경기일보로고
[동학농민전쟁 그 역사를 찾아]2.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1>
정치 경기뉴스

[동학농민전쟁 그 역사를 찾아]2.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의 전개과정<1>

탐학 관리 ‘혹세무민’에 봉기… 농민군 ‘보국안민’ 깃발 들고 싸워

어진 임금이나 현명한 관리들은 “백성은 물이고 임금은 배”라는 교훈을 잊지 않고 스스로를 단속할 줄 알았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고, 배를 엎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1800년 정조의 죽음 이후 조선은 내리막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정권을 장악한 수구세력들은 개혁세력을 죽이고 몰아냈다. 외척들로 똘똘 뭉친 세도정권은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는 일에만 몰두했다. 지역을 차별하고 벼슬을 팔아넘겼다.

서울과 경기, 충청도를 제외한 다른 지방 출신은 과거에 급제하기 어려웠고, 설령 급제를 하더라도 벼슬을 얻기 란 기대할 수 없었다. 돈으로 벼슬을 산 수령들은 온갖 명목으로 백성들의 고혈을 짜 냈다. 때맞추어 백성들의 항쟁도 불타올랐다. ‘홍경래의 난’으로 알려진 1811년의 평안도농민반란을 시작으로 1862년 진주에서 일어난 임술농민항쟁으로 이어졌다.

대원군이 서원철폐를 비롯한 야심찬 개혁을 실시하여 백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으나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해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에 자극받은 김옥균을 비롯한 젊은 관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으나 이 역시 ‘삼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조선은 이파리와 줄기가 병든 것은 물론 뿌리까지 썩어 있었던 것이다. 백성들은 위로부터의 개혁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그런데 경상도 경주 땅에서 썩고 병든 세상을 거름으로 하여 “사람이 한울이다”라는 위대한 사상이 싹을 틔워냈다. 그것은 수운(水雲) 최제우(1824~1864)가 창시한 ‘동학(東學)’이다.

시호시호時乎時乎 이내 시호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오만년지 시호로다

용천검龍泉劍 드는 칼을 아니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舞袖長衫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

호호망망 넓은천지 일신一身으로 비껴서서

칼노래 한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칼은 일월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를 덮여있네

만고명장 어디있나 장부당전丈夫當前 무장사無壯士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

수운이 지은 ‘검결(劍訣)’, 곧 칼노래이다. 첫 구절을 풀어쓰면 이런 뜻이다. “때로다, 때로다. 이내 때로다. 다시 오지 않을 때로다.” 수운은 밤중에 칼노래를 부르며 검무를 추었다. 칼노래의 가사와 검무의 춤사위에는 뒤틀린 세상을 바로 세우려는 기운이 꿈틀대고 있다. 결국 수운은 혹세무민하는 죄목으로 붙잡혀 대구 감영에서 목이 잘렸다. 

그러나 수운의 뜻을 이은 2대 교주 해월(海月) 최시형(1827~1898)의 줄기찬 포교 활동으로 동학은 학대 받던 민중들의 마음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해월은 “사람은 본래 한울이니 사람을 섬기기를 한울님을 섬기듯이 하라(人乃天 事人如天)”며 신도들을 가르쳤다. 이러한 동학의 교리는 탐관오리들에게 시달리던 백성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동학은 경상도를 거쳐 전라도 충청도로 퍼져나갔다. 특히 넓은 평야가 있는 풍요로운 전라도 땅에도 동학을 믿는 교도들이 빠르게 늘어났다. 동학교도들에게 탄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1892년 삼례에 수만의 교도가 모여 충청과 전라 감사에게 항의문을 보냈고, 1893년 2월에는 서울로 몰려가 상소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오히려 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가해지자 같은 해 3월에는 보은에서 최제우의 원통함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교조신원을 위한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전라도는 땅이 기름지고 들판이 넓어 풍요롭다. 그렇기 때문에 전라도는 관리들의 수탈의 표적이 되었다. 황현의 『오하기문』에 “호남은 재물이 풍부하여 관리들의 욕심을 채워 줄 만하였다. …그리하여 서울에서는 ‘아들을 낳아 호남에서 벼슬하여 살게 하는 것이 소원이다’라는 말이 떠돌았다”라는 글이 실려 있다.

1892년, 전라도 고부에 조병갑이 군수로 부임했다. 그 무렵 전라도 일대는 3년 동안 가뭄이 들어 살림살이의 형편이 매우 나빴다. 조병갑은 대왕대비 조씨의 인척으로 든든한 뒷줄이 있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본색을 드러냈다. 자신의 부친 조규순이 이웃 고을 태인 현감을 지냈다는 이유를 들어 송덕비를 세운다며 돈을 거둬들였고, 부자들에게는 부모에게 불효하고 동기간에 화목하지 못하다는 터무니없는 죄를 뒤집어씌우고 재산을 빼앗았다.

농민들의 원성이 가장 높았던 것은 농사지을 물을 가두는 보였다. 정읍천에 원래 보가 있었으나 조병갑은 농민들을 동원하여 그 아래 새로 ‘만석보’를 쌓고 첫해는 세를 거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세를 거둬들였다. 뿐만 아니라 황무지를 개간하면 세금을 면제해 주겠다고 하고서는 추수 때가 되면 강제로 세금을 거두어 갔다. 조병갑뿐만 아니라 균전사 김창석과 전운사 조필영까지 수탈에 가세했다.

1893년 초겨울, 한 무리의 농민들이 고부 관아에 몰려가 군수의 잘못을 따졌다. 조병갑은 주동자를 잡아 감옥에 가두고 매를 때려 농민 대표였던 전창혁은 결국 옥중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전창혁의 아들이 고부의 동학 접주 전봉준이다. 같은 해 11월 전봉준의 주도로 죽산 마을 송두호의 집에서 봉기의 당위성을 밝히는 격문과 사발통문을 작성하여 주위에 배포하였다.

거사날인 1894년 1월 10일, 농민들이 풍악을 울리며 배들[梨坪]을 돌자 죽창을 든 수천 명의 농민이 모여들었다. 전봉준은 이들을 이끌고 고부 관아로 쳐들어갔다. 관아를 점령한 뒤 창고를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고 만석보를 허물었다. 토지문서와 노비문서를 불사르고 무기고를 열어 무장했다. 사태의 심각함을 깨달은 조정에서는 조병갑을 파면시키고, 고종이 전교를 내렸다.

“고부에서 민란이 일어난 것은 실로 오랫동안 백성들의 원망이 쌓이고 정치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 까닭이지 그 연유가 하루아침에 일어난 것은 아니다. …전 군수 조병갑은 난을 불러일으키고 뇌물을 받은 죄를 범하였으니 의정부에서 잡아들여 죄를 다스리도록 하라. 그리고 장흥부사 이용태를 고부 안핵사로 임명하여 그로 하여금 하루빨리 부임하여 엄중히 사실 조사를 하여 보고토록 하고, 또 용안현감 박원명을 고부군수에 임명하니 난민을 수습토록 하라.”

농민군은 정부의 발표를 믿고 순순히 해산했다. 그러나 8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고부에 온 안핵사 이용태는 농민들의 투쟁을 철저히 진압하기 위하여 죄 없는 사람을 마구 잡아 가두고 재물을 닥치는 대로 빼앗았다. 또한 봉기에 참가한 농민과 그 가족들을 학살했다. 농민들은 다시 일어설 수밖에 없었다. 전봉준은 전라도 각 고을에 격문을 보내고, 호남에서 가장 세력이 컸던 무장의 동학 접주 손화중을 찾아가 지원을 요청하여 동의를 얻어냈다.

백산에 진을 친 전봉준은 4천의 농민군을 이끌고 고부와 태인을 공격하여 관아를 점령하고 백산에 돌아와 각 고을에 격문을 보냈다. 전봉준이 이웃고을과 긴밀한 연계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동학의 기층 조직인 포와 접을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곳곳에서 농민군들이 벌떼처럼 백산으로 모여들었다. 백산에는 고창, 무장, 흥덕, 정읍, 태인, 금구, 김제 등지에서 달려온 8천여 명의 농민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총대장에 전봉준이 추대되었고, 손화중과 김개남은 총관령이 되었다.

3월25일에 농민군의 행동강령이 공표되었다. 첫째, 사람과 가축을 함부로 죽이지 말 것. 둘째, 효성과 충성을 다하여 세상을 구원하고 백성을 편안하게 할 것. 셋째, 왜놈과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정치를 바로 잡을 것. 넷째, 군사를 몰아 서울로 쳐 들어가 특권양반을 없앨 것.

“우리가 의를 들어 여기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코 다른 데 있지 아니하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다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쫓아내고자 함이라. 양반과 부자 앞에 고통을 받는 아전들은 우리와 같이 원한이 깊은 자이니, 조금도 주저치 말고 이 시각으로 일어서라. 만일 기회를 잃으면 후회하여도 미치지 못하리라.” 갑오년 3월 27일 호남창의대장소 재 백산

1894년 5월초, ‘보국안민(輔國安民)’의 깃발을 높이든 농민군들이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조정은 농민군이 호남의 심장부를 차지하였다는 소식에 경악했다. 농민군의 다음 진격 목표가 서울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이 같은 기세로 진격하면 동학농민군의 ‘제폭구민(除暴救民)’이라는 깃발이 한양에도 휘날릴 것이다. 농민군의 총대장은 병법에 밝은 전봉준이었다. 그런데 농민군은 서울로의 진격을 주저하고 있었다. 바로 자신들의 봉기를 이유로 청나라와 일본이 개입한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김영호(한국병학연구소)

© 경기일보(www.kyeonggi.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댓글 댓글 운영규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