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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열사 고(故) 입암 이도천(立菴 李道天) 선도사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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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4. 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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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 한 것들 (2017.7.22)

천도교 춘천교구장 이도천씨 분신자살[중앙일보] 이 기사는 1978-08-07 오전 00:00:00 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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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5일 하오 1시 30분쯤 경기도 파주군 문산읍 마정리 임진강변에서 천도교 춘천교구장 이도천씨(50)가 석유(5ℓ)를 온 몸에 끼얹고 분신 자살했다.
이 교구장은 천도교 중앙본부에 보내는 유서 1통과 자신의 사진 4장을 남겨 놓았다.





신인간1988년 9/10합병호 관련기사 추가(2017.7.22)










간 1998년 8월호에 실린 이도천선도사관련 기사 사진추가 (2011.6.23)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6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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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일열사 고(故) 입암 이도천(立菴 李道天) 선도사는 누구인가

  - 본명 : 이도삼(李道三)

  - 약력 :  

포덕 49년 2월 2일 함경남도 함주군 삼평면 송호리 출생             

포덕 68년에 함흥농업학교를

포덕 70년에 수원농업전문학교를 졸업

     4월 5일 창도 70주년을 맞아 천도교에 입교

포덕 79년부터는 함흥정미소를 운영하면서 교회사업에 진력

     해방 후 함흥청우당 선전부장에 선임

포덕 87년에는 함흥 종리원장에 피선

포덕 89년에는 청우당 남북연락책임자로 활약하던 중 내무서에 체포되어 3년동안  영어생활(내무서에 체포되었을 때 심한 고문에도 굴복하지 않았고 저녁에는 목이 마르니 물을 달라고하여 이를 숨겨 놓았다가 저녁 기도식에 청수를 모시기도 했다)

포덕 91년 6⦁25사변시 10월 국군이 북진하자 미8군 정보과에 복무

     11월 흥남철수와 동시에 월남, 부산에 거주

포덕 93년 9월에 부산시 좌천 동전교실을 창설

포덕 96년 10월에 강원도 홍천군 동막리로 이주하여 정착(마을 이장과 서면 한서 중학교에서 교편생활, 이 해 반공포로로 석방된 둘째 아들 석찬군을 찾고 감격적인 상봉)

포덕 109년에 춘천으로 이주

포덕 117년에 춘천교구장에 선임되어 교구발전에 헌신.

포덕 119년 8월 5일 임진강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아래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유서를 남기고 머리에는 삼층관을 쓰고 단정히 도복을 입은채 통일을 염원하며 분신순도.


 

  “오천년을 하나같이 살아온 내 조국, 저 파란 하늘, 하늘에 반짝이는 별들, 기름진 들판에 무르익은 오곡들, 산 좋고 물 맑은 화려한 이 강산이 어쩌다 두동강이 되어 정성⦁공경⦁믿음으로 얽히고 설킨 부모형제, 오가지 못하는 이 서러움.

  한 많은 38선에 내 한몸 불살라서 궁을 꽃을 피우나니 겨레여, 한 덩어리 궁을로 모이소서"      (순도비문)

 

 

 

((위령문))

 

  오늘 8월 5일은 이도천 선도사께서 이곳 임진강변에서 분신 순도하신 날입니다. 이 날을 기하여 저희 후생들은 삼가 경건한 마음으로 선도사님의 위대하고 숭고한 뜻을 추모하는 위령제를 봉행하오니 고인의 성령이시여 감응하옵소서.

 

  아, 이도천 선도사님의 성령이시여!

 

  고인께서는 대신사께서 창명하신 무극대도를 온 세상에 펴서 이 땅 위에 살기 좋은 새 세상을 이룩하기 위하여 수도와 포덕에 힘쓰고 특별히 조국 강토의 분단극복에 온몸을 바치시고 순도하셨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다만 한 몸과 한 집을 위하여 살다가 자기 집 안방에서 편안히 죽어 가는 것도 슬퍼하는 것이 인간의 상정이거늘, 선도사님께서는 동학 천도교가 모든 사람의 진정한 행복을 찾는 길이며 나라와 세상을 구하는 무극대도임을 확신하고 민족통일이라는 고귀한 사업에 당신의 귀중한 생명을 바치신 것입니다. 그 거룩한 정신은 만고를 통하여 뜻있는 사람들의 옷깃을 적시게 하거늘 하물며 직접 선도사님의 유지와 유업을 이어받은 저희 후생들이야 그 추모의 심정을 무엇으로써 표현할 수 있사오리까!

 

  이도천 선도사님의 성령이시여 굽어 살피옵소서.

 

  고인의 그 거룩한 정신과 불멸의 공덕은 교회와 함께 그리고 저희 후생들의 심령 가운데서 영원히 장생하시면서 교회와 저희들의 앞길을 소소히 밝혀주시는 줄 믿습니다.

 

  과연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서 교회는 나날이 성장하고 발전하고 있으며 스승님 말씀대로 ‘산하대운이 진귀차도’하는 시운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물질문명은 고도로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점점 더 혼탁해지는 이유는 온 세상 사람이 한울님의 덕을 망각하고 각자위심(各自爲心)하여 불순천리, 불고천명하는 데 큰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정신개벽과 인간성 회복의 길을 밝히는 시천주 진리를 찾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인 줄 믿습니다.

 

  이도천 선도사님의 성령이시여 감응하옵소서.

 

  한울님께서 사람을 낼 때에 육신을 마련한 것은 당신의 뜻을 이 세상에 실현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한울님의 참뜻을 배반하고 불의만 감행하기 때문에 수운대신사께서는 한울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새 도법을 창명하시고 또한 그 진리를 펴시다가 순도하셨고, 선열들은 대신사의 가르침을 받들고 불의에 굴하지 않고 창생을 위해 일하시다가 순도하신 것입니다.

 

  저희들은 지금 모든 일을 실천할 수 있는 육신을 갖고 있습니다. 선도사님께서 천사님의 뜻을 받들어서 도를 닦고 불의와 싸우신 그 정신과 뜻을 또한 저희들은 받들어서 수도와 포덕에 더욱 힘쓰고 기어이 민족통일의 숙원을 완수하여 지상천국 건설의 대원을 달성하고야 말 것을 고인의 영전에 맹세하오니 이도천 선도사님의 성령이시여 굽어 살피시옵고 명우가 있어지이다.

 

                                                                             

                  포덕 147년 7월 22일

 

                  평화통일기행 참석자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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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 : 2013년 8월 5일 입암선도사 순도일을 맞아, 아래부분을 추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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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작성한 나의 글 중에서 입암선도사를 언급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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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1994년)에 동학혁명백주년기념사업회에서는 「동학혁명백주년기념논총」 상-하권을 간행한 바 있다. 하권의 '통일운동과 천도교'라는 항목에는 통일선언서, 호소문 등 1970년대 이후의 천도교에서의 통일운동에 관련된 자료를 수록하고 있다. 그러나 알짜배기는 빼고 있다. 1978년 8월 5일 휴전선 근처에서 통일을 염원하며 산화한 이도천 교구장에 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통일이 한갓 선언서나 호소문으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목숨을 바쳐 통일을 호소한 사건도 제대로 기록하지 못하는 그런 정신으로 어떻게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1978년 당시에야 워낙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렸기에 이도천 교구장의 분신사건은 어떤 미치광이의 장난 정도로만 보도되었다치자. 역사적인  동학혁명 백주년을 맞이하여 발행한 「기념논총」에 선언문이나 호소문 따위는 수록하면서 이도천 교구장의 분신사건은 일언반구 언급도 하지 못하는 천도교! 부끄럽게도 천도교에서는 '통일'을 누구보다도 많이 또 자주 외치기는 하지만 결코 '통일적'이라고는 여겨지지 않았다. " http://blog.naver.com/yamu1023/100012760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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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김용천님의 글, 이도천 선도사 관련 내용만 추가함 

http://cafe.daum.net/jinjuchondogyo/C14T/181

 

註 17; 黨志 - 이돈화가 집필한 것으로 1946년 11월 25일 함흥에 있는 대심인쇄소에서 간행되었다. 발행소가 종학원출판부로 되어 있지만, 일설에는 고(故) 입암 이도천(立菴 李道天) 선도사의 출자에 의해 평양이 아닌 함흥에서 출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입암 이도천의 본명은 이도삼(李道三)으로 1908년에 함경남도 함주군에서 태어나 1929년에 입교하여 1938년에는 함흥정미소를 운영하면서 교회사업에 진력하여 1946년에는 함흥 종리원장에 피선되었고 6.25동란으로 월남하여 1968년에 여러 곳을 전전하다가 춘천으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1976년에는 춘천 교구장에 선임되어 교구발전에 헌신하다가 포덕 119(1978)년 8월 5일에 임진강의 돌아오지 않는 다리 아래에서 통일을 염원하는 유서를 남기고 머리에는 삼층관을 쓰고 단정히 도복을 입은 채 통일을 염원하며 분신 순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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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형진 글 /

2006 5월 13일(토) 정읍에서 열린 제39회 동학농민혁명기념 학술대회 "동학에서 통일로"에서 발표한 글입니다. 동학, 천도교의 통일운동과 우리가 지향하는 통일이념을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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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정신과 통일운동
                                                                                                                                                    임 형 진 (경기대학교)

  Ⅰ. 서론

  지난 반세기 이상을 민족분단의 질곡에 처해 있었던 우리에게 21세기는 분명 화합과 평화의 이상적 민족국가가 수립되는 전환의 시기로 완성되어야 한다. 분단으로 인한 숱한 폐해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이 지적되었고 현실적으로 당하는 불이익만으로도 그 체제의 지속은 불가한 민족의 과제가 되었다. 현재 분단을 극복키 위한 민족통합의 운동은 이미 과정 중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일을 향한 과정의 토대이자 기초라고 할 수 있는 민족통합의 이념과 사상적 대안의 모색은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다.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의 제 2항인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가 공통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자 국내적으로 그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전개되었다. 그 만큼 통일시대를 대비한 이념적, 사상적 준비의 결여를 의미한 사례이다. 
특히 통일이 전통적인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과업이라고 했을 때 민족정신에 입각한 통일이념의 추구와 설정은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올바른 통일운동의 첫걸음은 분단의 원인을 치유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분단의 원인을 치유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는 분단을 야기 시킨 요인들을 해소한다는 것이지만 이념적으로는 오늘의 분단현실을 가능케 하는 마음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다. 통일운동은 분명 가장 현실적인 접근을 해 나가야 한다. 그러나 통일운동은 또 가장 미래지향적이어야 하며 그 목표와 원칙이 명확히 정립되어 있어야 한다. 한신대학교 평화연구소 편, 󰡔민족통일과 평화󰡕 한국신학연구소, 1995, 9쪽 참조.
그것은 우리의 목적이 통일자체가 아니라 통일이 추구하는 이상, 즉 민족 전체의 향상된 삶의 질의 구현에 있다는 것이다. 민족이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통일은 바로 이 길을 제시해 주고 선도하는 데에 있다. 
  19세기 국가의 누란지위 상태에서 등장한 동학은 당시의 시대상황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고 정확하게 분석하여 민족의 나아갈 바를 제시해 주었다. 동학은 민족전통사상을 계승하고 우리의 고유의 사유체계 속에서 창도된 종교로서 출발했지만 지극히 정치적이었다. 즉, 동학은 보국안민의 대내적 민족주의에 입각한 반봉건 반외세의 정치운동을 실천하여 후천개벽의 이상적 공동체를 실현하고자 했고, 대외적 민족주의로 포덕천하를 통해 도성덕립의 신인간 세상을 이루고자 했다. 그로 인해 동학은 창도 이래로 구한말과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 후에 전개되었던 자주적 통일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른 이른바 한국 근대민족운동사와 일치되는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60년 창도된 이래로 동학의 이름으로 이 땅에서 순도한 사람들을 아무리 적게 잡아도 40만 명이 넘는다. 순교의 대명사 천주교의 순교자가 1만 명에 이른다고 하니 천도교의 희생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내용적으로도 천주교의 순교자가 거의 종교자유만을 주장했다면 천도교의 순교자는 종교자유를 넘어서는 체제변혁을 외치다 희생당한 순교의 질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한편 해방이후 한반도의 상황은 냉전을 바탕으로 한 이데올로기적 국가형성의 논리가 민족이념에 입각한 민족주의적 공동체형성의 요구보다도 우월한 힘으로서 역사를 통하여 작용하였음을 보여준다. 21세기 들어서도 세계화로 특징되는 신 국제질서는 국가와 민족간의 경계를 불식하고 인류 공동체주의를 강조한다. 그러나 세계화 시대에도 기초단위는 민족국가이듯이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한 길은 여전히 민족주의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민족문제에 대한 민족주의 이외의 어떠한 해결책도 지금까지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거나 미봉책에 불과한 수준이었으며, 오히려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키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동학이 지향하고자 하는 민족공동체적 사상은 확실히 기존의 냉전논리와는 구별되는 한국의 전통적 정신문화에 기초한 민족주의적 정치사상이다. 동학사상에 내포되어 있는 조화와 화합의 이념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민족과 더불어 호흡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과 부침을 거듭했다. 우리가 민족평화통일과 그 이후의 전망을 민족이념에서 찾고자 한다면 동학사상은 반드시 재검토되어야 하고 나아가 한국민족주의의 원형적(ideal type) 위치에 놓여 져야만 한다.


Ⅱ. 동학⦁천도교와 교정쌍전론

  동학·천도교의 역사는 교정쌍전(敎政雙全), 교정조화의 역사였다. 즉, 창도 이래로 지금껏 단 한 번도 교회의 역사와 사회의 역사가 분리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교정일치의 이념은 천도교의 대표적 정치사상이나 다수의 학자들은 서구적 교정분리의 시각에 입각해 그것을 전근대적 요소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나 천도교를 교 혹은 정의 입장만을 중심으로 이해한다면 이것은 천도교의 일면성만을 평가한 것이 될 것이다. 천도교의 교정조화 이념은 서양의 ‘정교합일주의'처럼 세속적 군주가 종교의 교주를 겸하거나 종교에 의한 지배로 상징되는 서양 중세의 경우와도 구별된다. 천도교의 교정쌍전론은 종교와 정치가 대등한 입장에서 쌍방적으로(교정쌍방) 조화되는 것을 이상으로 하였다. 
  즉, 성신쌍전(性身雙全)의 이치에 의해 천도교는 전적생활을 사람에게 교시하고 그 이치에 의하여 정치와 도덕의 문제는 인간에게 있어 결코 분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인내천 생활에서는 그것이 제도로 나타날 때는 정이 되고 그것이 교화로 나타날 때는 교가 된다. 따라서 천도교에서는 세상을 새롭게 함에 있어 정신교화를 존중하는 동시에 물질적 제도도 중대시하여 그 양자를 병행하는 교정일치를 주장한다. 이돈화. 1933.『천도교창건사』제3편. 67쪽 참조. 그러나 천도교와 청우당의 관계는 교정일치라기 보다는 교정쌍전이고 교정조화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교정일치는 성신쌍전의 원리에서 발생한다.

   敎는 率性의 도를 이름이요 政은 齊家治國의 책을 일음이다. 솔성에 修道齊家를 말함도 교정일치이며 제가치국에 率性修身을 本으로 하는 것도 교정일치의 필요이었다. 성신쌍전의 원리에 있어 유물유심의 敎化는 鳥의 兩翼과 같다. 유심이 유물을 勝하면 인간세계를 文弱空寂에 빠지게 하는 폐가 있게 되고 유물이 유심을 승하면 인간은 野卑低劣의 지위에 수락하게 한다. 그러므로 교정일치의 도에서 心的 精神文化와 身的 物質文明을 평형으로 保持하게하여 靈肉合一의 治平을 圖하게 하는 것이다. 이돈화, 『당지』평양: 천도교청우당 중앙당선전부, 1947, 35-36쪽.


  의암 역시 성신쌍전은 교정쌍전이라는 도덕정치의 개념으로 구체화하였다. 의암성사 법설, 『천도태원경』,「도연구도」
즉, 도는 정법(정치)과 교리(종교)의 둘로 구성되어 있다. 도의 하위개념인 정은 법에 의하여 규율되고, 종은 이치에 의하여 밝혀진다. 
  이렇게 되지 못할 경우 정치권력은 쭉정이(秕)에 불과하게 되고 도덕은 혼미(迷)에 빠져버린다고 보았다. 쭉정이 정치가 이치에 맞지 않게 힘의 논리에 의하여 움직이는 정치를 뜻하며 도덕이 혼미해지는 것은 정의가 힘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정의를 농간하기 때문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자면 정치권력은 도덕을 만나야 하며 도덕은 정치권력을 만나야 비로소 도가 완성된다고 보는 것이다. 둘이 중심에서 만나서 잘 균형을 이룰 때 개인적 완성과 사회적 진보가 함께 이루어진다고 본다. 양자간의 이상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천도교의 사명으로 인식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권력의 도덕화와 도덕의 권력화를 천도교의 사명으로 인식했고 하겠다. 교정쌍전의 개념은 이와 같은 사유에서 나온 개념이다. 오문환, “의암 손병희의 국가건설 사상”, 한국정치사상학회 발표논문, 2004, 6.

  이러한 교정쌍전에 입각해 1860년에 창도된 동학은 한국근대사와 그 맥을 같이 한다. 조선왕조의 붕괴기인 19세기말에서 20세기로 넘어오는 근대화과정에서 뿐 아니라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 이후 통일운동의 전위에서 한민족에게 한국민족주의의 의식을 깊숙이 심어 주었다. 이것은 동학·천도교를 수양차원에서 그치는 기존의 타종교와 구별해 민족의 이름을 앞에 부치는 이유이다. 천도의 실현은 교의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에서 완성되어야 하는 구체적 개벽의 세계이다. 그러므로 동학·천도교는 현실세계에서 이상을 실현시키는 이른바 정의 영역에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참여한 것이다. 
  동학·천도교의 교정조화 이념은 그대로 민족의 문제와 연결된다. 민족은 그 실현의 주체이자 공동의 문화를 소유한 운명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모든 민족주의는 당사 민족 민족과 민족주의의 발생과 관련한 서구학계의 영속주의자(perenialists)와 근대주의자들(modernists)의 논쟁에 관해서는 A. D. Smith, "The Problem of National Identity: Ancient, Medieval and Modern?", Ethnic and Racial Studies, vol. 17, no. 3, 1994. 참조바람.
의 민족운동으로 구체화된다. 민족운동의 담당자는 항상 억압과 수탈의 대상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치는 민중들일 수뿐이 없다. 그래서 그들의 요구는 언제나 전체 민족의 자주 자립과 해방이라는 요청과 합치된다. 따라서 민족운동의 담당자로서의 민중의 민족주의가 그 나라의 민족주의로 실체화 될 때만이 민족의 자주자립, 통일된 민족국가의 수립과 발전이라는 민족주의적 요구의 실현이 가능해진다. 동학·천도교의 교정쌍전론은 이 같은 민중적 부름에 대한 시대적 요청이었다. 특히 현재 천도교의 통일운동 전위단체인 동학민족통일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천도교 청우당의 경우는 그 시기 천도교 민족운동의 핵심으로서, 천도교의 교정쌍전 이념을 이해하는 고리이자, 향후 천도교 민족운동의 방향성을 암시하고 있다.
  일제시대 건설된 청우당은 천도를 실현하는 전위조직이자 전위정당으로서 구체적 실천을 통해 당시의 민족모순을 극복하는 최일선에 있었다. 그것은 문화운동으로, 계몽운동으로 그리고 7대 부문운동으로 확대되어 압제하의 민족문제 해결점을 종교의 차원을 넘어서 정치현실의 차원에서 모색했었다. 또한 해방 후 청우당은 외세의존적 정치세력이 주도하는 남북한에서 자주적 통일민족국가수립운동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이후 냉전의식이 지배적인 사회분위기 속에서도 정치적 변화를 갈망하는 천도교의 정치지향은 계속되었다. 때로는 반공종교의 대표로 때로는 두 차례에 걸친 전임 교령들의 월북으로 인한 친북종교로 매도되는 등 언제나 정치적이었다. 단순히 종교적 수준의 활동을 넘어서는 천도교의 이 같은 통일자주국가수립운동은 그들의 교정쌍전론을 이해할 때만이 설명이 가능해 진다. 


Ⅲ. 동학⦁천도교의 통일운동

  1. 해방 후 청우당의 자주적 민족통합운동

  해방 후 청우당 부활전당대회는 10월 31일 천도교 중앙대교당에서 지방대표 1천여 명이 참석하여 민족통일기관 결성촉진, 전재동포 구제, 실업대책, 기관지 발행 등을 결의하였다. 임원은 위원장에 김기전, 부위원장 이응진, 총무국장 마기상, 정치국장 승관하, 조직국장 이석보, 문화국장 구중회, 특별국장 마기상 그리고 중앙위원 47인 등을 임명했다. 󰡔자유신문󰡕 1945. 11월 5일; 󰡔매일신보󰡕 1945. 11월 6일.

  부활전당대회에 이어 청우당은 우선 10월 5일 ‘민족국가의 만년대계 설계와 인류문명의 개조’를 위하여 개벽사를 다시 설립하고 조선적 문화를 창달키로 하고 『개벽』지를 복간하였다. 「復刊辭」, 『開闢』제73호, 1946.1, 23쪽.
개벽사의 이사장은 홍순문, 이사는 김기전, 이돈화, 최난식, 이은 이었고 주간은 김기전이 맡았다. 또한 청우당은 과거의 부문운동을 회복하기 위해 부문단체로서의 천도교청년회를 부활시켰다. 청년회는 1945년 11월 25일 부활했는데 첫째, 우리는 사인여천의 교양과 훈련으로 청년대중의 원기진작과 인격향상을 기함, 둘째, 우리는 민족의 자주독립과 근로대중 해방의 전위대가 됨을 기함, 셋째, 우리는 공고한 단결과 활발한 행동으로서 당 운동을 절대 지지함의 신강령을 발표하였다. 조규태 앞의 글, 661쪽 참조.

  한편 남쪽에서의 청우당 부활에 이어 북쪽에서도 청우당은 부활되었다. 해방 후 이미 상당수의 교세를 자랑하던 북쪽 지역에서는 1946년 2월 8일 평양에서 천도교청우당결성대회를 갖고 뒤이어 2월 18일 당을 재건하였다. 『北韓年表』, 국토통일원, 1980, 31-32쪽.
재건된 당시의 임원으로는 위원장 김달현, 부위원장 박윤길·김정주, 정치위원 김달현·박윤길·김정주·전찬배·김윤걸·백세명·김도현, 상무위원 상기 7명과 김진연·한몽응·이춘배·조기주·장학병·김봉엽 등이 선임되었다. 이어 5월 31일 청우당 함북도당을 결성하였다. 󰡔북한년표󰡕 44쪽; 성주현 앞의 글.

  해방 후 청우당의 첫 번째 정치적 활동은 미군정의 인민공화국 부인에 대한 총부의 핵심간부인 정광조의 유감표명이었다. 이것은 청우당의 인공에 대한 인정여부를 떠나 우리의 힘으로 수립한 정치단체에 대한 외세의 간섭에 반대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청우당의 이후 활동이 ‘자주’ 천도교단이 정치적 용어로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자주’이다. 그러나 현재 북한에서 쓰는 자주가 단지 외세를 배격하고 남북한끼리의 협의를 우선한다는 방법론적인 측면에서의 용어인데 비해 남측 천도교의 자주는 사람과 사람사이의 지배를 벗어 던지며 사람과 자연사이의 착취를 종식시키며 사람과 신 사이의 복종구조를 바로 잡아 생명의 참 가치를 실현하고 밝게 드러내는 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천도교중앙총부, 『신인간』2000년 8월호, 88쪽 참조. 
라는 점에 가장 주목하고 있음이 그것을 증명한다. 또한 천도교 총부는 1945년 11월 23일 「임시정부를 받들어 속히 강토를 회복하자」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이 성명서에서 천도교에서는 “환국한 임시정부 영수들을 중심으로 전민족적 총력을 집중 통일하여 민족자주의 완전한 정권을 수립하도록 하자”고 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의 주석이었던 김구 등이 9월 3일 발표한 「임시정부당면정책」 14개조를 찬성한다고 하였다. 아울러 청우당은 “17년간 義로써 싸워온 임시정부에 대하여 최대의 경의로써 그 지지를 표명하고, 아울러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함으로써 조선독립의 완성을 촉진하자는 의미로 기독교, 대종교, 불교, 천도교, 유교, 천주교의 6 종교단체가 조선독립촉성종교단체연합대회를 조직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반대하기 위하여 김구·조소앙·조경한·김약산·유림·김규식·신익희·김붕준·엄항섭·최동오 등의 임시정부 인사들이 12월 28일 탁치반대국민총동원회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자, 청우당은 이와 행보를 같이하여, 12월 28일 조선민족이 아직 자주·독립할 자격이 없다는 구실로 조선을 신탁통치 하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중앙신문󰡕 1945. 12월 30일.
또한 조선민족이 아직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명백히 미 소 양군의 남북 주둔에 있음을 지적하면서 “신탁통치안을 철회하지 않는 한 우리 黨은 삼천만 대중의 선두에 서서 자주적 완전독립을 戰取하기까지 결사적 항쟁을 계속하기로 결의한다”는 내용의 강경한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자유신문󰡕, 1945. 1월 30일.
이어서 청우당은 김구 등이 주도하는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가 조직되자 위원장 김기전, 간부 정광조 등이 위원으로 참여하였다. 󰡔서울신문󰡕, 1946. 1월 1일. 당시 천도교인으로 이에 참여하였던 사람으로는 위원장 권동진, 위원 오세창·백세명·이군오·이인숙 등도 있다.
또한, 청우당의 산하단체인 천도교청년회는 조선공산당이 신탁통치를 찬성한 것에 대하여, 1946년 1월 16일 조선공산당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서울신문󰡕, 1946. 1월 19일.

  그러나 정국이 초기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우익은 비상국민회의, 좌익은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 대립하자 청우당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민주주의적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정치적 기본노선을 이탈한 편좌 편우의 모든 경향을 양기하고 절대다수인 민중을 기초로 한 여러 집단과 양심 있는 개인들의 연결로 민족적 대동단결을 촉성’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청우당은 민족적 분열은 미소 양군의 분할점령에 기인하였으므로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해서는 미소 양군의 철수는 원하지만 우선적으로 자유로운 정치활동 보장과 양국의 내정간섭의 배제를 주장하고 있다. 즉 미소 군정당국이 민족통일과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방해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과 준비된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는 단체의 선정 문제로 결국 미·소간의 의견충돌 의견충돌의 핵심은 모스크바 결의문에 담겨있는 ‘민주주의’의 해석 다툼이었다. 즉 조선의 임시정부 수립을 위해 조선내의 민주주의적 단체와 협의한다는 내용을 가지고 협의 대상이 되는 민주주의적 단체가 누구인가를 놓고 대립한 것이다. 소련은 모스크바 결의문에 동의한 단체만이 민주주의적 단체라는 주장이었고, 미국은 민주주의는 반대의 자유도 포함하는 것이므로 결의문에 반대한 단체도 협의대상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로 인해 5월 8일 결렬되었다. 북한의 일사불란한 정치적 의견통일에 당황한 미군정은 남한 내에서 극우와 극좌파를 배제한 온건 좌우파인 중간세력으로서 임시정부를 수립하려는 의도에서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하였다. 청우당은 7월 좌우합작통일촉진회를 구성하고 이 운동의 촉진운동을 전개하였다.
  미군정은 좌우합작위원회의 건의대로 46년 10월 12일 ‘조선 과도입법의원의 창설에 관한 법령’을 통과시키고 법령에 따라, 12월 7일 임명된 관선의원 45명과 선출된 민선의원 45명이 발표되었는데, 청우당에서는 이응진이 관선의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최동오와 정광조가 각각 좌우합작위원회와 천도교를 대표하여 관선의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이응진 등은 12월 12일 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개원식이 열려 이응진은 청우당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조선일보󰡕 1946. 12월 12일.

  그러나 보수 기득세력으로 구성된 민주의원에서 청우당이 할 일은 많지 않았다. 결국 군정연장 내지는 한반도에서의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미소 양국의 의도와 이에 편승해 단독정부를 수립코자 한 매국세력을 확실히 파악한 청우당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자주적 민족통합에 의한 통일정부수립운동이었다. 
  1947년 10월 들어 미소공위가 임시정부 수립에 대한 진전이 없자 한국문제는 유엔으로 넘어갔다. 한국문제의 이관에 대해 우익은 환영일색이었지만 민족주의 세력에게는 분단의 가능성에 대한 우려를 금할 수 없는 것이었다. 10월 28일 유엔정치안전보장위원회는 한국문제를 상정 토의하고 11월 14일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는 한국독립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총선거를 통한 한국통일안을 결의하였다. 이에 대해 청우당은 국제적 관련성을 가진 조선 독립문제가 유엔총회에서 남북총선거로서 통일정부를 수립케 된 결의안에 대하여 절대 찬성하나 유엔 조선위원단의 사업이 여의치 못할 경우 적절한 대응을 할 것이다’라고 논평하였다. 『경향신문』1948. 1월 16일.

  그러나 1948년 들어 조선위원단의 활동은 소련의 반대로 북한 입경이 거부되었다. 남북 자유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이 소련측의 반대로 무산되자 청우당은 앞서 발표한 바와 같이 현실적 대응으로 남북한 천도교인이 남북분열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3월 1일 총궐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남북한의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한 주민의 자유총선거를 통한 자주적 민족통합의 통일국가수립을 주장한 이 운동은 사전에 발각되어 남한에서는 성명서 발표로 끝났고 북한에서는 맹산, 양덕, 덕천, 순천, 영변 등 평안도 일부지역에서만 전개되었다. 그리고 남한의 천도교중앙총부와 청우당의 비밀지령에 의해 추진된 이 사건으로 북한에서는 평양의 김명희, 김덕린, 김일대, 승관하, 김도현 등 천도교 및 청우당 주요 인사와 1만7천여 명이 교인이 검거되어 희생되었다. 김달현일파의 밀고로 사전에 17,000여명의 교역자가 체포되고 187명이 처형되는 등 운동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지만 영변 등지에서는 시위행렬이 30리나 되는 등 북한민중들의 가슴에 통일의지와 민족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고 이후 영우회라는 비밀조직으로 이어져 점차 관제화되는 청우당을 대신했다. 이 사건을 천도교에서는 3·1재현운동으로 명명하고 있다. 󰡔삼일재현운동지󰡕 신인간사, 1969.
당시의 통일선언문 중 통일공약 5장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우리의 자유의사에 의거치 않는 어떤 정치체제 어떤 경제구조도 단호히 이를 배격한다.
2. 우리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국토통일과 민족단결을 저해하는 모든 세력의 준동을 봉쇄한다.
3. 우리는 유엔의 결의를 성실히 준수하여 유엔 한국위원단 입국을 환영한다.
4. 우리는 남북통일정부가 수립되기 최후 일각까지 이 운동을 계속한다.
5. 우리는 이 운동을 비폭력·무저항주의로 일관한다. 오익제 편, 󰡔천도교 요의󰡕 천도교중앙총부 출판부, 1986, 211-212쪽.


  통일공약 5장은 당시 천도교의 통일운동의 뚜렷한 기본방향과 원칙의 제시로 볼 수 있다. 이 공약은 민족자결원칙, 민주원칙, 평화원칙, 국제협력원칙 등 통일의 기본원칙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특히 4, 5항은 기미년 3·1운동 당시의 그것과 흡사하다. 이와 같은 자유총선거를 주장하는 ‘민주원칙’과 외세개입반대와 민족단결을 내세운 ‘자결원칙’ 그리고 비폭력의 ‘평화원칙’ 등은 변함없는 통일원칙과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소련의 북한 입국거부로 유엔은 다시 가능한 지역으로의 선거영역을 축소하자 이승만 등은 5월 남한단독선거를 통한 단정 수립을 주장하고 김구는 남한단독선거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리고 5월 5월 선거를 반대하는 각 정당·사회단체를 대표하여 엄항섭 홍명희 등 5인의 발의로 통일독립운동자협의회를 결성하자 청우당도 한독·민독·근민·독로·신진·민중동맹·민주한독·사민·건민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 협의회의 강령은 첫째, 통일독립운동자의 총역량 결집을 기함. 둘째, 민족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도함. 셋째, 민족강토의 일체 분열공작을 방지함 등이었다. 󰡔서울신문󰡕 1948. 5월 4일. 󰡔조선일보󰡕 1948. 5월 4일; 조규태, 앞의 글, 685쪽.
또한 청우당의 부문단체인 청년회도 단선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조선일보󰡕, 1948. 5월 8일.

  결국 남북 총선거가 불가능하게 되자 김구와 김규식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요인회담을 시도하였다. 북한은 이를 받아들여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갖자고 제의하고 3월 28일 김구, 김규식 등 개인 15명과 한국독립당, 민주독립당, 민주한독당, 민중동맹, 청우당, 사회민주당, 독립노농당, 신진당, 근로인민당, 남노당, 인민공화당, 전평, 전농, 민주여성동맹, 유교연맹, 기독민동협조 등 17개 정당 단체에 초청서한을 발송하였다. 이에 청우당은 6명, 북조선청우당에서 9명이 각각 참석하여 『조선일보』1948. 4월 21일 및 4월 28일. 그러나 자격심사에서 4명만 통과되었다. 이외에도 천도교인으로는 최동오, 신숙이 참여하였다.
조선의 내외정세에 대한 정확한 규정, 국토와 민족을 분열하는 단선을 반대하는 전국적 통일방략, 정치와 민생의 혼란을 방지하고 자주통일독립을 하기 위하여 양군철퇴를 촉진하는 방략 등을 논의 및 합의하였다. 
  그러나 분단저지를 위한 남북협상은 결국 실패로 귀결되고 그것으로 남북한의 단독정부 수립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남한에서의 5·10선거가 끝난 뒤 북한에서는 제 2차 남북협상을 제의했지만 백범 등은 거절했다. 그러나 청우당은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평양에서 개최한 제2차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참석하였다. 『조선일보』1948. 7월 13일.
그것은 외세에 의한 분단을 막아보려는 청우당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청우당의 이 같은 해방정국에서의 민전과의 연대, 미군정 정책의 비판, 좌우합작을 통한 자주적 임시정부 수립운동, 남한단독정부 수립 반대운동, 남북협상참여 등은 미군정과 이승만의 독촉, 한민당 등 극우 세력으로부터 탄압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이미 청우당은 1947년 7월 15일 보성사가 김성건 등 20여 명으로부터 습격을 당해 활자를 전복하고 인쇄기에 모래가 뿌려지는 테러를 당했으며(󰡔자유신문󰡕7월17일, 󰡔중앙신문󰡕7월17일), 8월 11일에는 수도경찰청에서 좌익계 인사에 대한 검거령이 내리자 12일까지 민전, 전평, 전농 등 좌익계 단체 외 협동조합, 근로인민당, 청우당, 반일투쟁위원회 등의 사무실을 수색하고 3,4백명을 검거하였다. 이때 청우당 관계자는 박우천, 김병제, 계연집 등 수명이 피검되었다.(󰡔조선일보󰡕1947. 8월13일) 
결국 청우당은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인 1949년 8월 10일 육군에 의해 김병순 등 당원 30여 명은 ‘북로당과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의 지령을 받아 천도교 내에서 남조선 천도교의 중심세력을 분리시키고 북한 청우당의 세력을 부식시키며, 파괴·암살을 위한 지하당원’이라고 하여 검거되었다. 그리고 12월 26일 청우당은 「정당에 관한 규칙」에 의거하여 정리·해체되었다. 이로써 해방 후 완전독립과 자주적 민족통일국가 건설을 추구했던 청우당은 이승만 정권 하에서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결국 해체되고 말았다. 일제와 해방공간을 거치면서 민족의 진로를 제시하고 그것을 위한 치열한 활동을 전개했던 청우당의 자주적 민족통일운동의 민족주의적 실천은 그로써 종말을 맞고 말았다.

2. 청우당 해체 후 천도교 통일운동

  국토의 분단과 청우당의 해체는 천도교에는 이중의 고통이자 난관으로 다가왔다. 국토의 분단은 이북에 고향을 두고 있는 대다수 천도교인에게 이산의 고통을 주었으며 청우당의 해체는 천도교의 양 날개인 교와 정에서 정의 영역을 무장해제 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천도교는 분단과 민족상쟁의 전쟁, 그리고 그 이후 장기적인 남북대립 최대의 피해집단이 되었다. 그러므로 천도교의 통일운동은 민족 구성원의 일원으로서의 의무말고도, 분단으로 인해 약화된 교세의 회복운동이자 천도교가 추구하는 이상사회의 실현운동이라는 부가적 목적을 가진다. 
  청우당의 해체로 정치운동의 구심점을 잃은 천도교의 방황과 답보는 오래 지속되었다. 특히 오랜 기간 반항적 정치단체로 인식되어 온 천도교에 대해 남북한 정부는 각기 다른 이유로 천도교를 탄압했다. 그렇기에 천도교는 남북에서 점차 소외되고 소멸되어 갔다. 그런 가운데서도 천도교의 통일운동은 작지만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50년대 이후 천도교의 통일운동은 박길수, “천도교 통일운동의 전개과정”1-6, 『신인간』1999. 12월 호에서 2000년 7월호까지 연재된 글을 참조.
6·25 당시 거제 포로 수용소에서 천도교 신자인 인민군 포로들의 작은 통일운동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극단적인 좌우대립을 극복해 보고자 한 그들의 평화적인 종교적 노력은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살벌한 포로 수용소에서의 작은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반공포로 석방시 천도교인 포로들은 천도교의 상징인 궁을기를 앞세우고 귀환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 천도교의 통일운동은 당시의 남한 분위기와 함께 일방적인 반공일변도로 경도되었다. 이는 전쟁후의 고조된 냉전분위기와도 관련 있지만 천도교 내부에서도 월남 교인들을 중심으로 집행부가 구성된 측면도 있다. 특히 1956년 아시아 반공대회에 당시 천도교 교령이 한국측 수석대표로 참석할 정도로 천도교는 반공운동의 최일선에 있었다. 그런 가운데 1957년 12월 동학회가 구성되어 청우당의 후신으로서의 역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당시 동학회는 첫째, 인내천 원리를 바탕으로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구현, 둘째, 동귀일체 이념에 입각한 경제체제 실현, 셋째, 사인여천 정신에 맞는 새윤리, 새도덕의 수립, 넷째, 인내천주의의 신문화창조, 다섯째, 민족의 공고한 단결과 민주우방과의 제휴하에 남북통일을 촉성한다는 강령을 발표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활동에까지는 못하고 준비 단계에 머물고 말았다. 
  이 같은 천도교의 통일운동이 일시적인 변화를 맞은 것은 4·19 혁명 이후 제 2공화국시대였다. 천도교는 먼저 4·19 혁명을 적극 지지하면서 그 운동을 민족통일운동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자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계속해서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통일방안들을 거듭해서 발표했다. 이 시기 천도교의 기관지인 『신인간』을 통하여 많은 진보적 통일안들이 제기 되었는데 유엔 원조하의 자유 총선거를 재실시하자는 안, 자주적 통일안, 중립화 통일안, 남북경제회의 창설안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통일방안들을 집약할 운동단체의 결성 필요성에 따라 “동학당 결성 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60년 11월 경에 구성된 회의는 취지문을 발표하고 400여 명의 준비위원과 각종 위원회를 구성했다. 취지문에서 ‘동학당’은 민주당 정권의 무능을 비판하고 민주적 경제와 도덕적 참여정치를 주장하는 한편 남북총선거에 의한 통일론을 제시하여 남북한의 연방제나 중립화 대신 자주적인 통일과 외교노선을 주장했다. 그러나 동학당은 같은 해 12월 22일 동학당 발기대회를 주장해 본격적인 청우당의 복당과 계승을 천명하였으나 이듬해 5·16 쿠테타의 발생으로 인해 그 빛을 보지 못하고 소멸되었다. 
  그럼에도 동학당준비위원회는 국내외 정세보고를 꾸준히 발표하고 교양문집을 발행해 동학이념을 통한 통일민족국가 수립의 방략을 계도하고 준비해 나가는 업적을 쌓아 가고 있었다.  
  동학당 해체 후 적어도 1980년대 중반까지 천도교의 통일운동은 완전 지하화 했다. 오히려 냉전적 분위기에 편입되는, 아니 생존의 몸부림 같은 반공운동의 최일선에서 선봉역할에 충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1968년의 “3·1학회”를 결성해 3·1정신을 통일운동의 근간으로 하자는 민족주체적 자주통일운동을 전개한 것이나, 1978년 8월 당시 춘천 교구장이었던 이도천 선도사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 근처 임진강변에서 남북통일을 호소하며 분신 순도한 사건 등이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초부터 천도교만의 특성을 나타낼 수 있는 통일운동이 서서히 부상했다. 즉, 운동의 바탕이 될 이론의 준비가 그것이고 대중운동화를 위한 소규모 운동의 전개가 그것이다. 먼저 1982년 63회를 맞는 3·1운동을 기념하면서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철야기도회와 특별기도회가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으며 기도기간동안 아침식사를 단식하여 성미를 모아 통일운동의 밑거름으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당시의 이론가들인 오익제, 임운길, 김철 등을 중심으로 천도교 통일이념을 개발하고 소개하는 작업들이 꾸준히 이어졌다. 1984년의 ‘민족통일연구회’(회장 오익제) 결성이나 1986년의 ‘민족통일대학강좌’ 등 바로 그것이다. 특히 ‘민족통일대학강좌’는 3개월을 1기로 하여 격주로 강좌를 실시하면서 통일이념의 보급에 진력했다. 매 강좌마다 학계의 권위자들을 모신 강의에는 약 2-300명의 청중이 모일 정도로 열기가 높았었다. 이는 장차 천도교 통일운동의 전위단체인 “동학민족통일회” 결성의 바탕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의 천도교 통일운동은 청우당 이래로 천도교 정의 영역을 담당할 ‘동학민족통일회(이하 동민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989년 제 26차 정기대의원 대회에서 천도교 전위단체 설립을 결의한 천도교는 1991년 5월 드디어 ‘동민회’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동민회는 그 설립 취지문과 선언문 등을 통하여 ‘인류는 같은 한 울안의 공존질서 속의 지구촌 동포이며 우리 민족 역시 남북으로 분단되어서는 안 될 한 겨레’임을 선언하고 ‘세계냉전의 종식과 변혁의 전환기를 맞이하여 남북이 이 지구상에서 마지막 대결의 장으로 남아서 분단의 장벽을 허물지 못하고 있는 것은 민족자존과 지성에 대한 모독이 아닐 수 없다…(중략) 조국통일은 양 체제의 혼합·절충이나 흡수가 아닌 남북을 초월하고 포용하는 민족대화합에 의한 인간화의 원점에 선 민족동질성 회복의 통일문화 창출의 새로운 창조적 민족통일노선이 되어야 한다’고 통일운동의 원칙과 방향을 명시했다. 동학민족통일회, <설립취지문>(1991. 5. 11), <선언문>(1991. 5. 11)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초월하는 제3의 사상요청에 부응 ②인간화의 신문화창조에 선봉 ③남북의 평화와 통일시대를 여는 기수적 역할 ④사회정화와 자연환경정화 실천운동에 헌신 ⑤복지, 평등을 추구하는 평등주의적 신경제질서의 정의실현 ⑥자유, 평등, 평화의 민주사회 발전을 위한 기수적 역할 ⑦민족문화운동의 전위적 역할 담당 ⑧건강한 사회, 힘있는 나라건설에 앞장 ⑨새로운 민족사회와 세계평화 건설의 개벽군 자임. 김관희, “동학민족통일회 발전방안”, 동민회발전방향 학술대회 발표 글, 2004, 10.

  동민회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첫째, 동학사상을 기본으로 조국의 평화통일을 성취한다.
둘째, 사인여천의 윤리로 도덕적 복지사회를 구현한다.
셋째, 경천·경인·경물의 삼경사상을 적극적으로 실천한다.
넷째, 자유·평등·평화의 민주주의 발전을 기한다.

  동민회는 “동학의 이념과 사상을 이념적으로 선양하기 위하여 조직확장 사업, 교양사업, 남북교류협력 사업 등을 위한 세미나, 강연회 개최, 홍보용 책자 간행” 등의 사업을 하기로 하고 우선 민족통일강좌를 이은 민족정신 선양의 교양강좌를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학술 발표회를 주최하여 통일운동의 저변확대에 노력했으며, 천도교의 입장을 대변하는 분단극복을 위한 선언문 발표 등을 하였다. 또한 남북 천도교 실무자 회담 참석, 수차례에 걸친 방북으로 북 청우당과의 회합, 남쪽의 민화협과 통일연대 등에 참여하는 등 남북긴장완화에 나름대로 기여해 왔다. 특히 동민회가 오랜 연구와 여론 수렴, 토의 그리고 수정 끝에 만들어 낸 천도교의 통일방안은 동민회의 가장 큰 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천도교의 공식적인 통일방안인 ‘민족자주 동귀일체 통일방안’의 1차 안이 확정된 것은 1999년 5월 29일이었다. 이 1차안은 필자를 포함한 다수의 전문가들이 수 차례의 수정을 거쳐 2002년 11월 25일 “민족자주 통일방안”으로 최종 확정되어 현재 천도교의 공식 통일이념이 되어 있다. 

  2000년 6·15 남북공동선언을 계기로 민간부문의 남북교류가 확대되면서 천도교의 통일운동은 여느 단체 못지 않게 급물살을 타게 되었다. 특히 천도교는 남한 내에 있어서 거의 유일하다 할 정도로 북한 내 연결 통로를 가지고 있는 단체라고 할 수 있다. 즉, 북한 내의 가장 활발한 종교인 천도교와 그 전위단체로서의 북조선천도교 청우당 북조선천도교 청우당은 현재 북한 조선노동당의 우당으로 1948년 3·1재현운동으로 북한에서 자취를 감추었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남북대화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재등장했다. 초대 위원장은 월북한 최덕신씨이었고 그의 사후 부인인 류미영씨가 맡고 있다.
이 그것이다. 이미 천도교의 꾸준한 대북접촉을 통해 1999년 북경에서 남북한 천도교 최고 지도자들이 회동하여 조국통일의 전위에서 활동할 것을 합의한바 있었다. 합의문은 5개 항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4개 항이 남북통일에 천도교가 앞장 설 것을 다짐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후 봇물 터지듯 밀려오는 민간교류에 있어 천도교는 그 세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게 되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간의 동민회의 노력과 북한지역에서 차지하는 천도교의 비중 덕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 있다. 북한 내 종교인구에 대한 북한측의 발표를 보면(2001년 ‘유엔인권이사회’의 질문에 답한자료) 2001년 현재 북한의 천도교인은 1만5천여 명, 기독교 1만여 명, 천주교인 3천여 명, 불교인 1만여 명으로 되어 있다. 외형적인 숫자말고도 북한에서 민족종교로서 천도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고 할 수 있는데 청우당위원장인 류미영씨가 6·15공동선언 후 첫 이산가족 상봉단의 대표로 참석하는 등 남북의 천도교를 민족사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중요한 민족주의 세력으로 인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천도교단 내에서는 ‘천도교가 통일의 주역이 되어야 한다’, ‘통일은 천도교 중흥의 중대한 계기가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의 통일 대망론과 함께 ‘과연 통일이 되겠느냐’, ‘통일이 된 들 천도교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통일 회의론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전자는 통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하면서도 정작 북한과의 교류나 협력에는 인색하고, 후자는 북한에 존재하는 천도교인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천도교가 많은 부분에서 북한과 교류를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들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에 비하면 지나친 역할 축소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남북 사회단체나 민간인들의 대화에서 동학⦁천도교는 늘상 주제가 되고 있음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해본 적이 거의 없었다. 
또한 천도교단내에서 통일문제가 정책의 우선순위가 되지도 못하고 있다. 북한 천도교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 역시 시간이 흐르고 북한쪽 천도교인들과 접촉 빈도수가 늘어나면서 차츰 오해의 고리를 털고 천도교의 동덕임이 받아들이는 추세이다. 따라서 천도교의 통일운동은 많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문제 일뿐 그 당위성을 거역하기 어려울 것이다. 


Ⅳ. 동학정신과 통일이념

  동학정신이 지향하는 통일이념은 이상적 민족주의 정치이념을 바탕 한다고 평가된다. 그것은 동학이 민족의 과제 앞에서 운동의 향도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것뿐만 아니라 민족 진로의 좌표까지를 제시해 주어야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민족주의는 언제나 당사 민족의 오늘과 내일을 책임 있게 조망하고 이끌어 줄 때, 제 역할을 다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시하는 시론적 성격의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 시천주의 평등정치, 동귀일체의 신경제, 다시 개벽의 문화주의, 도성덕립의 윤리국가라는 통일이념도 그 같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1.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

  동학이 지향하는 민족통일의 정치이념은 우선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를 목표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민족으로 구성된 권력단체다. 단일민족으로 구성된 것도 있고 복수민족으로 구성된 국가도 있다. 단일민족은 혈통이 같고 역사가 같고 언어문자, 풍속습관이 같고 문화가 같고 경제적 조건이 같고 최종으로 공통숙명을 가졌다. 그러므로 남북이 한민족이라는 공통의 숙명은 통합된 모습으로 함께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바탕한다.
  동학의 민족주의 노선은 보국안민 차원의 1차원적 민족주의를 넘어선 포덕천하의 국제주의를 지향하는 차원 높은 민족주의이므로 이를 신민족주의라고 정의 할 수 있다. 신민족주의는 세계 각 민족이 세계공화를 위해 자기 민족을 일률적인 횡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종으로 향상하는 주의이다. 따라서 민족은 세계공화에 기여하는 단위민족으로서의 의무와 역할을 분담하게 된다. 김철, “동학의 정치사상-청우당의 삼대강령을 중심으로,” 󰡔東學精義󰡕 동선사, 1989, 366쪽 참조.

  자주의 문제 역시 자주가 고립이 아님을 인식해야 한다. 즉, 자주는 左로는 고립을 제거하고 右로는 의타를 배제한 행동관념이다. 즉, 자주란 상호부조의 자연적 원리를 활용하여 자주자유의 독립적인 존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민족의 자주정신은 먼저 개인들의 정신적 변화를 요구하고 그것들의 총체적 합인 국가의 자주성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자주성이 없는 국가에서는 아무리 국민 개개인의 자유가 보장된다고 해도 국민들이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결정할 수 없다. 군사, 경제, 문화 등의 대외 종속성이 갈수록 심화되는 듯한 우리의 경우 시급한 자주성 확보의 노력이 요구된다. 전쟁직전까지 간 1994년 북한의 핵위기와 1997년의 IMF사태를 기억한다면 우리의 의사와 상관없이 심각한 문제들이 무차별적으로 강요되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

  또한 통일은 이상적인 민주국가를 목표해야 한다. 민주국가란 문자 그대로 인민이 직접 국가의 주권을 가진다는 말로 진정한 의미의 근대적 정치체제를 말하고 있다. 확실히 통일국가는 모든 국민이 주인이 되고 모든 사람을 하늘같이 섬기고 하늘같이 대접받는 그야말로 모든 국민이 주인 노릇 하는 진정한 민주국가가 되어야 할 것이다. 자유로운 선거를 통해서 진정한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어야 하고 삼권분립의 원칙 하에 권력의 균형과 통제가 이루어져 높은 차원의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풍요를 누리는 최고 복지의 나라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 때 동학의 이상적 민주국가는 천도의 진리가 확증되어 개개인의 자유가 확실히 보장되고 敎는 진리로서 사람을 교화하고, 정치는 법으로 바르게 다스리는 敎政雙全의 제도가 바람직하다고 본다. 이를 통해 정치·경제·문화·윤리·교육 모든 면에서 진정한 민주주의가 실현되어야 할 것이다.

2. 시천주의 평등정치체제

  동학사상의 민주주의적 정치사상은 인간평등의 원리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시천주 사상이 바로 그것인데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을 모신 존재이므로 인간을 이 우주의 가장 最高最靈의 자리에 위치한 위대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어떠한 인간이든 성실성과 존경심만을 가졌다면 모두 하느님과 같은 존재이다. 즉 誠과 敬의 2자만 지키는 인간이라면 노예든지 천민이든지 모두 군자요 성인이 되지만, 이 성과 경이 없는 양반이나 토호 같은 지배층은 참다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재래의 문벌과 신분상의 낡은 봉건적 인간관계에 대해서 동학에서는 성·경 2자에 의해 평등하고 스스로 각성한 근대적 개인을 발견하고 있다. 위의 글, 37쪽. 특히 성·경문화에 대해서는 오익제 편저,『천도교요의』133-138쪽 참조.

  당시의 엄한 신분제사회 속에서 동학의 이 같은 평등주의사상은 충격적인 발상의 전환이었으며 기층민중에게는 엄청난 호소력을 지녔었다. 실제로 동학에 입도해 혁명에까지 참여했었던 백범도 동학의 이 같은 평등주의에서 자신이 찾는 이상향을 발견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42) “상놈된 한이 골수에 사무친 나로서는 동학의 평등주의가 더할 수 없이 고마웠고, 또 이씨의  운수가 盡하였으니 새나라를 세운다는 말도 해주의 과거장에서 본 바와 같이 정치의 부패함에 실망한 나에게는 적절하게 들리지 아니할 수가 없었다.” 김구, 「백범일지」 송건호 편, 『김구』한길사, 1980, 37-38쪽 참조.

  동학사상의 ‘시천주’원리는 천시인, 인시천이라 하여 인간이 하늘과 직결되는 바 ‘시천주’는 내 몸에 하느님을 모시고 있다는 뜻으로 동학의 천인합일사상을 제출하게 된다. 또한 인간은 시천주적 존재이기에 때문에 천시인이고 인시천이 되며 시천주이기 때문에 인간은 본래부터 자유롭고 평등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몸은 하느님을 항상 모시고 있는 집과 같으므로 사람이 하느님을 늘 모시고 있다면 모시고 있는 그 사람도 하느님과 같이 존경해야 하고 만약 인간이 존경받지 못한다면 하느님은 그 존재가치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시천주 한 존재이므로 하느님 앞에 누구나 평등하고, 지극히 존엄하다는 두 가지의 뜻을 동시에 지니게 된다. 그리고 13자 주문으로 지극히 마음공부를 하면 현인군자가 된다고 말한다. 만권시서도 따라올 수 없다는 것이다. 전통적인 유교사회의 인간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도성덕립의 길이다. “열세자 지극하면 만권시서 무엇하며 심학이라 하였으니 불망기의 하여서라 현인군자 될 것이니 도성입덕 못미칠까”(『용담유사』 「교훈가」). 
따라서 수운이 제시한 인간관은 하느님을 모신(시천주) 사람으로서의 평등성과 존엄성에서 출발한다. 이찬구, “동학의 하늘님(天主)에 관한 연구: 영부와 주문을 중심으로,”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0, 174쪽.

  결국 동학의 인간주체사상은 모든 사람이 계층과 관계없이 각기 신을 내면화하게 되는 것으로 인간의 존엄성을 신격화시키고 남녀노소나 직업의 귀천이나 지위의 고하나 빈부의 차별을 막론하고 도덕적으로 차별이 있을 수 없고 인권이 무시될 수 없는 인간평등의 정치이념을 제시하게 된다.
  남북은 현재 상이한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주체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침으로 삼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실시하는 국가이다. 또한 남한은 민주공화국을 천명하고 복수정당제 하의 대통령제를 실시하며 주권을 국민이 갖는다고 하고 있다. 지난 해 남북공동선언은 우선 당분간 서로의 정치체제를 인정·존중해서 ‘1국가 2체제’를 유지한다고 했지만 이것이 영구적일 수 는 없다.
  따라서 서로의 공통점을 찾아보면 바로 ‘민주주의 정치’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이 때 북한의 민주주의를 남한이 어떻게 받아들이는 지는 별개로 치고 우선 그들도 인민이 정치의 주체가 되는 인민을 위한, 인민에 의한, 인민들이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민주주의 정치를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추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통일 국가의 정치이념은 민주주의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모색되어야 한다. 자유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우선하는 것만큼 사회주의는 개인간의 평등을 우선하고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이 두 가치를 모두 포용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두 가치는 모순된 상반관계에 놓여있다. 즉, 개인에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면 평등은 실현될 수 없고 평등 개념의 확대는 인간의 창의성의 발로라고 할 수 있는 자유의지를 꺾고 만다. 결국 진정한 민주주의의 최고 이념과 가치는 자유와 평등이 아닌 인간 존엄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성을 실현키 위해 자유와 평등은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 존엄을 가장 잘 구현할 수 있는 것이 동학사상의 시천주이다. 개개인간에 주체성과 가치성을 최고로 부여한 시천주의 정치적 의미를 담아내는 정치체계가 동학이 추구하는 통일이념이다.

3. 동귀일체의 신 경제

  동학이 지향하는 민족통일국가의 경제는 동귀일체의 이념에 입각한 민주주의적 경제제도이다. 동귀일체란 모든 사람의 근본이 무형한 하느님을 깨닫고 일체의 원리로 돌아가 한마음 한뜻으로 화합하자는 뜻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과 모든 존재는 무형한 하느님의 이치기운으로 화해 났고 하느님의 이치기운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같이 하느님의 아들딸이며 한 동포, 한 형제, 한 생명체인 것이다. 우주는 하나의 영체요 하나의 생명체인 것이다. 敬天·敬人·敬物의 정신과 인오동포 물오동포 『해월신사법설』「삼경」
의 정신으로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 초자연과의 관계를 재정립하여 온 세상이 한 마음 한뜻 한 몸 한 가족 같이 화합하고 풍요롭게 사는 일류 복지국가를 건설하자는 것이다. 인류는 자타일체 동귀일체의 원리를 몰랐기 때문에 서로 속이고 훔치고 빼앗고 죽이며 살아 왔다. 이제는 그런 생활태도는 청산해야 한다. 동학민족통일회, 󰡔민족자주동귀일체통일방안󰡕 동학민족통일회, 1999, 26쪽.

  동귀일체는 생리적 신체에서 상징한 이념이다. 생리적 신체는 그 자율적 본능으로 百體를 기화작용의 평등으로 통일한다. 자유의지를 자유로 조화하는 것이다. 영양을 평균으로 분배하는 것과 혈액을 자유로 평등 순환하게 하는 것이며 행동을 격에 맞추어 조절하는 것이며 원기를 內外百體에 충족하게 하는 등 그 조화로움은 실로 자연의 영묘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유기체의 본능이다. 이 같은 유기체론을 원용하여 사회조직을 유기체화해 인체의 생존원리에 들어맞도록 이상하는 것이 동귀일체의 생활이었다. 
  즉, 신체와 사회는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지니 신체가 세포라는 개체로 조직되어 있다면 사회는 개인이란 개체로 조직되어 있으며, 신체가 오장육부, 사지백체, 이목구비의 기관으로 형성되어 있다면 사회는 각종의 기관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 밖에도 신체는 신경의 상부지휘와 하부전달기관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총괄하는 정신이 있고 혈맥이라는 교통수단을 가진다. 사회는 지휘부와 이들의 지시를 실천하는 하부조직이 있으며, 그것들을 통합시키는 그 사회의 통일사상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교통 통신으로 그 전달은 이루어진다. 이처럼 신체와 사회는 유기체로서의 기능을 거의 비슷하게 공유하고 있다. 특히 신체가 동식물의 섭취로 신체라는 유기체를 유지하듯이 사회라는 유기체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올바른 경제제도가 있어야 한다.
  사회진화도 인간의 신체를 강제할 수 없듯이 인위적 강제로 강행시킬 수 없다. 즉, 사회진화 역시 불가항력에 의한 무위이화로 발전해야 한다. 이돈화, 『당지』평양 천도교청우당 중앙당 선전부, 1947, 70-71쪽 참조.
인간이나 사회나 유기체이기에 무위이화의 자연적 진화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진화이다. 무위이화가 실현되는 것이 동귀일체이다. 동귀일체의 신생활이란 무엇보다도 강제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동귀일체의 경제는 자본주의니 사회주의니 하는 말을 쓰지 않으면서 인간 개체의 윤리적인 이념을 바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시천주의 사상으로 인간들을 무장시켜 인간의 원초적인 소유충동을 창조충동으로 변환시킴으로써 경제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다. 그것은 분배에 보다 치중하는 사회주의 경제론을 지향하면서도 부의 저하분배가 아닌 부의 평등적 향상분배인 사회 민주주의적 지향성을 동시에 담아내고 있다. 명백한 사실은 경제문제라는 것이 독립된 변수로 홀로 설 수는 없다는 점이다. 경제는 분명 정치와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으며 사회적 여건도 뒷받침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특히 경제운영의 주체가 인간인 이상 인간의 심성과 자질 등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 김철. 앞의 글, 379쪽.
결국 경제문제는 시천주 사상으로 무장하고 동귀일체한 인간이 운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남북한 모두의 경제체제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표방하지만 ‘혼합경제체제’를 유지한다고 할 수 있다. 혼합경제체제는 사적 소유의 확대와 사회화의 확대는 상대와 상황에 따라 대처할 수 있다. 즉, 시장경제의 활성화와 국가의 개입이 조절되는 경제체제의 유연성은 자연스러운 상황 속에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사유화와 사회화의 문제를 절대적이고 경직된 것으로 받아들여서 안 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무위이화 하듯 경제 역시 무위이화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동학의 통일 경제이념이다.

4. 다시 개벽의 문화주의

  수운은 구도 단계에서 현실의 과제 상황을 극복하려는 데 시점을 맞추고 있었다. “한계에 이른 현 문화 체제를 다시 개벽하자”는 것이 바로 구도의 과제였다. “다시 개벽”이란 “문화의 틀을 다시 열자”는 뜻이다. 수운의 표현대로 “개벽 후 5만년” 『용담유사』「용담가」
과 “십이 제국 괴질 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용담유사』「안심가」,「몽중노소문답가」.
라는 두 말을 연이어 보면 “개벽”했던 것을 “다시 개벽”하자는 말이다. 즉 “처음 열었던 문화를 다시 새롭게 열자”는 것으로 앨빈 토플러의 제3의 물결과, K·볼딩의 문명 전 사회→문명사회→문명 후 사회의 개념과 유사하다. 동학이 지향하려는 것은 바로 낡은 문화의 틀을 새로운 문화의 틀로 “다시 개벽”하자는 데 있다. 특히 표영삼 천도교 선도사는 문화의 틀을 ① 규범의 틀, ② 기술의 틀, ③ 언어 정보의 틀, ④ 관념의 틀로 규정하고, “이 네 가지 틀로 문화가 이루어지는 데 문화의 틀에는 씨앗 역할을 하는 관념의 틀이 으뜸이다. 이 관념의 틀을 바탕에 깔고 규범의 틀, 기술의 틀, 언어 정보의 틀이 형성되게 마련이다. 새로운 문화를 다시 개벽하자면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관념의 틀을 창조해 내는 일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의 관념은 초감성적인 세계와 감성적인 세계로 이분화한 바탕 위에 놓여져 왔다. 즉 초감성계는 최고가치체계(신·절대정신 등등)가 있는 높고 성스러운 영역으로 생각해 온 반면, 감성계는 낮고 속된 일상적인 것이 있는 영역이라 생각했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전래된 문화체제의 관념이다. 이 관념의 틀은 기본적으로 초감성계는 높고 감성계는 낮다는 수직 관계를 바탕에 깔고 있다. 그리하여 귀족과 천민을 인위적으로 구분하여 봉건신분제를 만들었고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지배관계를 만들어 이분적인 사회가 형성됐다.”고 지적하며 동학의 후천개벽의 당위성을 제기하고 있다. 표영삼, “동학과 민주사회주의,” 민족문제연구소간, 『한국민족주의와 국제주의』민족문제연구 제3집, 1995, 333쪽.

  수운은 낡은 문화체제를 “다시 개벽”하는 길을 찾아 나서 6년간 고행한 끝에 1860년 4월 5일에 새로운 신념체계를 득도했다. 종교체험을 통해 얻어낸 신념체계의 핵심은 바로 시천주 신관념이었다. 『동경대전』 「논학문」엔 “侍者 內有神靈 外有氣化 一世之人 各知 不移者也”라 했다.
“천상에 상제님이 옥경대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 이치 고사하고 허무 지설 아닐런가” 『용담유사』 「도덕가」.
“날로 믿고 그러하냐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하단 말까” 『용담유사』 「교훈가」.
라는 말로 시천주 신관념을 표현했다. 후천개벽은 이런 시천주에 바탕 한 이상사회를 향하는 과정이다. 
  개벽의 첫 발자국은 동학의 출발이었다. 수운 자신이 1860년 4월 5일 한울림을 접한 날을 開闢時 國初日이라고 말하고 있다. 『용담유사』「용담가」.
이는 하느님을 만나기 전의 모든 질병으로부터 벗어나 ‘다시 태어나는 삶’, ‘군자사람’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군자사람’의 삶이란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아가면서 하느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삶을 말한다. 수운은 이것을 무위이화라고 했다. 이러한 무위이화의 삶에서 그 주체는 개개인간이었다. 시천주 신앙으로 개벽된 인간들이 모여 지상천국의 이상사회건설이 수운의 최종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동학적 후천개벽의 이상사회는 그것을 구성하는 주체로서의 인간의 각성을 전제로 성립한다. 실제로 어떠한 이상적 정치체제의 등장도 그것의 실현은 개별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했을 때 어떤 유형의 인간이 그 공동체의 주인인가는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수뿐이 없다. 수운의 직접적인 언사는 아니지만 동학에서 이 미래의 세계주인을 新人間으로 규정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처럼 새로운 이념으로 무장된 새로운 인간들이 주역인 세상을 이루고자 한 것이 수운의 목표였기에 거기에는 당연히 기존의 문화와는 다른 새로운 문화의 건설을 요구하고 있다. 개벽은 분명 삶의 양식의 변화이다. 개벽된 인간의 삶은 당연히 생활양태의 변화를 이룰 것이다. 삶의 양식의 큰 틀을 문화라고 규정했을 때, 개벽은 새로운 문화의 확산을 의미한다. 즉, 당시의 지배계급만을 위한 부유층의 문화도 아니고 퇴폐 향락적 문화도 아닌 보다 많은 다수가 즐길 수 있고 민족의 가치와 내용이 담보되는 문화의 시대를 의미한다. 원래 문화란 시대적·사회적 산물이니 만큼 구시대 구사회의 기성문화가 그대로 신시대 신사회에 적용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現存한 문화의 각 부문에 있어서 구시대의 모든 잔재를 청소하는 동시에 대중생활을 향상시키고 대중정서를 함양시킬 수 있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신문화를 건설하여야 한다. 
  현대의 심화는 곧 문화의 향상에 있다고 했을 때 후천의 개벽이 인문의 개벽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수운의 언명은 확실히 증명되고 있다. 문제는 그 같은 고급문화의 주역이 다수의 민중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적어도 문화에 관한 한 만인이 혜택을 보는 문화적 공산주의가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랑스의 Post-Modernist인 P. Bourdieu는 특히 문화권력을 논하면서 이제 문화는 소수의 계급을 위한 하나의 권력이 되었으며 그것이 지배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점을 냉철히 지적하고 있다. 피에르 부르디외 저, 최종철 옮김,  󰡔구별짓기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上下, 새물결, 1995.
통일이념으로서의 문화는 남한의 퇴락적 문화를 거부하고 북한의 특권층을 위한 문화도 거부하는 것이다. 통일한국의 문화는 분명 새로운 삶의 양식을 요구하고, 시천주를 자각한 새로운 인간의 새로운 가치관에 의해 정립된 문화이기에 다시 개벽된 세상의 문화가 될 것이다. 

5. 도성덕립의 윤리국가

  동학의 통일이념은 우리 국민이 높은 윤리·도덕성을 지닌 통일국가를 만들기를 목표한다. 이른바 도성덕립의 윤리국가가 그것이다. 도덕성을 상실한 조선에 도덕성 회복을 외치며 등장한 것이 동학이었기에 윤리·도덕성의 회복이야말로 국가기강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제로 개인이든 사회든 윤리 도덕이 확립되어야만 국가가 부패하지 않는다. 세계사의 흥망성쇠를 보더라도 순수한 외침에 의해서 나라가 망한 예보다도 대내적인 부패와 도덕적 타락에 의해서 내우외환을 자초하여 국가를 멸망으로 몰고 간 경우가 허다하며, 특히 정치 지도자의 부패와 타락은 나라의 존망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어 더욱 경계의 대상이 된다. 김철, 앞의 책, 367쪽.

  동학에서는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양식을 敬天命, 順天理로 파악하고 있다. 『용담유사』「권학가」,『동경대전』「포덕문」
그러나 인간의 당연한 존재양식은 현실의 세계인 선천에서는 왜곡되고 도착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경천, 순천의 상태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천의 존재를 인식하고 두려워하고 그야말로 ‘참’되게 존재해야 한다. 이러한 상태를 동학에서는 ‘도성덕립’ 도성덕립은 원래 『동경대전』「수덕문」에만 한 번 나오고 도성입덕은 『용담유사』「교훈가」,「도수사」,「도덕가」 및 「논학문」등에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도성입덕이 아닌 도성덕립을 사용하는 것은 전자가 도만을 강조한 것이라면 후자는 도와 덕 모두를 강조한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김철, “문법상 교리문제 몇 가지,” 󰡔신인간󰡕 포덕 142년(2001) 5월호, 54-56쪽 참조.
으로 규정하며 이는 또한 후천의 사회상태를 뜻하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개개인간의 도덕성과 인격적 성품의 확립으로 동학적 이상사회가 완성된다고 본다. 
  현대 사회는 선천시대의 도덕은 몰락되고 후천 새 시대의 새 도덕이 확립되지 못한 상황에서 혼란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건전한 도덕의 기초 위에 물질문명이 꽃을 피워야 할 터인데 현실은 마치 뿌리의 병든 나무에 꽃을 피우려는 것과 같아서 언제 어떻게 될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공포에 휩싸일 수밖에 없는 실정에 있다. 도덕성 회복을 외치는 소리는 높지만 옛날로 되돌아 갈 수도 없고 새로운 대안도 없는 막연한 실정에 있으므로 결국 구두선에 그치고 만다.
  그러나 동학적 이상국가는 후천의 신인간 세상이다. 그리고 신인간은 도성덕립으로 완성된다. 동학에서의 신인간의 도성덕립은 誠·敬·信을 통하여 이루어진다고 본다. 즉 성·경·신은 인격 완성의 길인 것이다. 성·경·신은 한울님에 대한 정성·공경·믿음을 말하며 일상생활 속에서의 실천덕목을 의미한다. 사람은 정성과 공경 그리고 믿음을 모두 갖추도록 노력해야 한다. 정성만으로도 안되고 공경만으로도 안되고 믿음만으로도 안되고 세 가지 모두를 도야함으로써 인격완성을 이룬다고 본다. 성경신을 신인간 교육의 목표로 설정함은 그것이 천도가 제시하는 후천개벽의 동학대국과 이상적 인간, 즉 지상신선이 되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각 개인의 도성덕립은 성경신 수양을 통한 인격완성의 실현 이찬구는 이와 같이 완성된 인격체를 특히 최령체(最靈體)라 불렀다. 그는 신인간이라는 말이 경전에 나오지 않는 점에 유의한 듯, 수운의 최령자(논학문1장)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그 실현방법으로 수심정기, 성경신, 오심즉여심의 회복을 들고 있다. 최령체는 신인간의 영적 측면을 강조한 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이찬구 앞의 석사논문 210쪽)
을 통해 이루어진다. 
  동학에서 성경신을 보다 구체적 실생활에 적용시킨 것이 三敬사상이다. 즉, 삼경의 실현을 통해 천도를 생활 속에서 구현시키고 있다. 따라서 삼경의 체현은 구체적 실현 목표인 생활의 도이다. 삼경사상이란 경천·경인·경물의 사상을 말하는 것으로 한울님을 공경하고 사람을 공경하고 물건을 공경한다는 뜻이다. 이처럼 동학이 추구하는 이상세계는 무극대도가 실현되는 세상이다. 그래서 근대 이후 등장하는 서구의 이성적 사고를 바탕하는 합리성의 평등주의에 비해 동학은 모든 존재의 존엄과 평등을 지향하는 도덕적 개념을 바탕한 무극대도의 평등주의를 지향한다.
  오늘 우리가 통일하고자 하는 국가의 이념은 우리 전래의 하늘을 공경하는 사고를 바탕하고 민주주의 이상인 인간 존엄을 실현하며 나아가 황폐해진 생태계의 회복을 위해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향한다. 이 같은 시대정신에 남북한의 차이가 존재할 수는 없다. 동학의 통일이념은 바로 이 같은 남북한의 공통분모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이것은 민족통일의 운동이자 우리가 잃어버린 윤리성의 회복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새롭게 통일된 민족국가는 다시는 도덕성의 상실로 인한 수모를 겪어서는 안되고 나아가 전 세계의 윤리 모범국가로 우뚝하길 목표한다.


Ⅴ. 결론

  현재 남과 북은 상이한 정치경제체제를 반세기 이상 유지시키고 오면서 그 가운데 상당부분의 이질성이 심화되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수 천년의 운명 공동체로 삶을 같이 영위해 온 역사의 눈으로 볼 때, 오늘의 이질성은 매우 사소한 차이에 불과하고 결코 극복치 못할 수준도 아니다. 오히려 여전히 많은 부분의 공통성이 우리를 함께 살 수 있는 한 민족임을 자각시키고 있다. 
  동학의 통일운동과 민족통일이념이 주목하는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고유의 사유의 세계가 단기간에 형성된 것이 아니듯 그것을 바탕 한 정치이념 역시 오랜 기간을 걸쳐 우리에게 내면화되어 있다가 구한말에 동학의 이름으로 등장한 것이다. 동학은 당시의 시대적 모순을 극복키 위한 처방을 제시해 방향성을 상실한 민족 앞에 등대의 역할을 해 주었다. 어쩌면 오늘의 분단된 조국현실 역시 당시 못지않은 민족의 시련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다. 동학의 위대함은 그것이 제시하는 이념이 시대를 초월해 유용성을 가진다는데 있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동학의 형성이 바로 우리 민족의 삶과 정신 속에서 농축된 에토스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동민회는 특히 작년 이래로 북의 청우당과 획기적인 유대와 교류를 증진해 남북한의 공동분모를 만드는데 일익을 하고 있다. 남북의 동민회와 청우당은 이미 종교적 공통성을 넘어 이념적 공동의식을 바탕하고 문화적 공동체를 지향함으로써 통일운동의 한 모범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과가 지속적으로 이어지고 향후 더욱 활성화 될 것이라는 점은 전적으로 동학정신을 공유한 가운데 전개되는 통일운동에서 가능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동학의 공동체 주의는 결코 우리 민족만의 행복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해 일가의 한 부분으로서의 공동체를 소박하게 역설하면서 전체주의를 지향하고 있다. 이것이 동학의 민족주의를 구 민족주의가 아닌 신민족주의 또는 우리의 문화를 바탕한 문화적 민족주의의 전형으로 꼽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 동학정신이 추구하는 민족통일이념 역시 근시안적인 운동의 차원에 머무르지 않는다. 즉 동학은 운동의 배경이자 이념적 토대를 제공하고 나아가 통일국가의 이상적 모형을 제시하고 있다. 분명 통일은 가장 현실적인 곳에서 이루어져야 하지만 통일은 민족의 삶의 질이 고양되는 이상적이고도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비록 그것이 다소 비현실적이고 이상론적이라 해도 원대한 이상과 목표에 우리의 희망을 설정한다면 그 의의는 충분하다고 본다. 그래서 동학이 추구하는 민족자주의 이상적 민주국가, 시천주 이념을 바탕 한 개개인의 주체적 참여와 역할이 강조되는 평등의 정치체제, 각자위심의 경제체제가 아닌 동귀일체의 신경제, 새로운 삶의 양식을 요구하는 다시 개벽의 문화주의, 무극대도의 큰 덕이 실현되는 도성덕립의 윤리국가는 우리 민족의 나아갈 바와 다름없다.◎


 

탁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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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으로 보는 세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