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신문화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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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1독립운동 이후 천도교청년당은 민족의 문명의식 고취와 새로운 문명, 문화를 통한 민족정신 함양을 위하여 청년운동·출판문화운동·농민운동·어린이운동·여성운동 등 각 계층을 망라한 전방위적인 문화운동을 전개하였다.
3·1독립운동 이후 민족의 문명의식 고취와 새로운 문명, 문화를 통한 민족정신 함양을 위하여 천도교는 거국적인 신문화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이들 문화운동은 주로 3·1독립운동 이후에 전개한 것으로, 청년운동·출판문화운동·농민운동·어린이운동·여성운동 등 각 계층을 망라한 전방위적인 문화운동이라고 하겠다.
이들 문화운동의 개요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1) 1) 청년운동
천도교는 3·1운동 후 교역자들이 대부분 체포·투옥 당하여 한때 그 공백을 면치 못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때에 젊은 청년교인들 중심으로 선열의 정신을 이어 받아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고자 하는 운동이 전개된다.
이것이 곧 포덕 60년(1919) 9월 2일 발족된, 민족의 신문화 창조·계발과 새로운 사상·교리의 연구 보급을 목적으로 청년교인들이 중심이 된 천도교청년교리강연부(天道敎靑年敎理講硏部)이다.
이 청년 조직은 전국 각지에 지부를 설치 확대하면서, 다음해 4월에는 천도교청년회로 이름을 바꾸고, 편집부사업으로 개벽사(開闢社)를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인 월간 「개벽」을 발간하는 한편, 순회강연을 실시하고, 또 체육부사업으로 야구단을 조직하여 활동하였으며, 신체조를 보급하는 등 문화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그리고 포덕 63년에는 청년회 소년부사업으로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여 어린이운동에 앞장서기도 한다.
그 후 포덕 64년(1923) 9월에는 청년회를 발전적으로 해체하여 천도교청년당을 창립하였다. 청년당은 급속도로 발전되어 포덕 66년(1925)에 지방당부 120여개에 당원 수 3만여 명을 확보하였고, 7개 부문운동을 전개하여 농민운동, 노동운동, 소년운동, 여성운동, 학생운동, 청년운동, 상민운동 등 각 계층 부문에 걸쳐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면서, 매년 11월 1일을 ‘포덕의 날’로 정하여 계몽에 앞장섰다.
또한 청년당은 포덕 67년(1926) 5월부터 ‘신인간 자학(自學)’ 제도를 창설하였으며 포덕 68년 12월에는 조선정형(情形)연구회를 설치 운영하였다.
그 후 청년당은 포덕 72년(1931) 2월 16일에 그 동안 별도로 활동해오던 천도교청년동맹과 합동하여 천도교청우당(天道敎靑友黨)으로 개칭하여 더욱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리하여 포덕 73년에는 당학(黨學)제도를 창설했는데, 다음해에는 이를 발전시켜 우리나라 최초의 통신대학강좌로서 「자수대학강의(自修大學講義)」를 간행 실시하고, 포덕 75년에는 기관지 「당성(黨聲)」을 통한 계몽교육에 힘썼다.
그러던 중 청년당 안에 비밀리에 항일핵심조직으로 오심당(吾心黨)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거사를 모의하여 오다가, 이것이 포덕 75년에 왜경에 탄로되어 230여 명의 간부당원들이 투옥 당하게 되었다. 이어 포덕 78년(1937) 중일전쟁과 함께 일제의 강압으로 그 후 천도교의 청년조직은 지하로 잠적하게 되었다.
(2) 2) 출판문화운동
천도교는 3·1독립운동 이후 「개벽(開闢)」지 발간을 비롯한 출판·문화 활동에 치중하여 당시 우리나라의 출판문화운동을 단연 주도해 나갔다.
「개벽」 지는 포덕 61년(1920) 6월에 창간, 포덕 67년(1926) 8월까지 통권 72호를 내고 일제의 강압으로 폐간당한 잡지다.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로서 「개벽」은 1920년대의 문화·사상계를 대표하는 잡지로 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개벽」지의 발간정신은 그 제호가 말하듯 천도교의 개벽사상을 의미한 것이며, 천도교의 이념 구현에 뜻을 두면서도 종교적 색채를 나타내지 않고 사회 대중계몽에 주력하였다.
또한 「개벽」 지는 민중지로서의 특성을 보이면서, 민중을 위한 민중의 잡지임을 자처하였다. 또 한편 「개벽」 지는 항일 민족저항 잡지로서 수없이 많은 고난을 겪었다. 따라서 창간호가 압수 당하여 임시호를 낸 것을 비롯하여 발매금지 34회, 삭제 벌금 정간 등의 탄압이 잇따랐고, 초기 4년 동안 발행권수 43만 4천여 권 중 무려 4분의 1에 해당되는 11만 2천여 권이 압수를 당하였다.
한편 「개벽」 지의 성격은 종합교양지이면서 문학지적 특성을 보이고 있어, 우리나라 근대문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기도 했다.
「개벽」지가 포덕 67년(1926) 발행금지를 당한 후, 천도교는 「별건곤(別乾坤)」(포덕 67년 창간, 통권 103호), 「혜성(慧星)」(포덕 72년 창간, 통권13호), 「제1선」(포덕 73년 창간, 통권11호) 등을 연이어 발간하고, 이밖에 「학생」(포덕 70년 창간, 통권18호), 「중성(衆聲)」(포덕 70년 창간), 「새벗」(포덕 70년 창간) 등 수많은 정기간행물을 발행하였다. 또한 계층별 독자를 위한 「어린이」지와 여성지, 농민지 등이 별도로 간행되기도 하였다.
(3) 3) 농민운동
천도교의 농민운동은 주로 포덕 66년(1925) 10월 29일 설립한 조선농민사(朝鮮農民社)를 통하여 전개되었다. 조선농민사는 처음에 사우제(社友制)로 조직하였다가 포덕 69(1928)년 2월 14일 조직을 개편하여 중앙에 농민사 본부를 두고 각 군에 군농민사와 그 밑에 이(里洞)농민사를 두는 계통조직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각 지방 농민사는 포덕 69년 현재 23개였던 것이 포덕 74년(1933)에는 150여 개로 증가하였고, 사원 또한 20만 명에 달하였다.
조선농민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농민 잡지로서 「조선농민」(포덕 66~71년, 통권30호), 「농민」(포덕 71~74년, 통권42호) 등의 월간잡지를 보급하는 한편 「대중독본」「대중산술」「비료제조법」「양잠법」 등 농촌 계몽문고본을 보급하여 농업의 근대화에 주력하였다.
이와 같이 농민을 대상으로 한 잡지와 농촌문고본의 보급은 당시 문화의 불모지였던 한국농촌사회에 농민문화 보급의 선구적 계몽역할을 하게 된다. 특히 사회적으로 등한시되고 있던 농민의 지위 향상과 농촌의 경제적 파탄을 구제하는 등 농민의 의식적 각성을 촉구하는 한편, 농민의 자주·근면과 협동의식을 고취하고 나아가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는 운동 등을 전개한다. 동시에 과학영농과 기술을 계도하고 일상생활에서 비과학적 전근대적 타성에서 탈피하도록 합리적 사고방식을 심어주었으며, 농촌의 문맹퇴치와 한글 보급 등 크나큰 기여를 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연회 개최와 농민학교 및 야학 운영에 앞장서서 전국에 3천 여 개소에 달하는 「농민야학」을 실시하고 또 ‘농민의 날’을 제창하여 농민의 권익옹호와 계몽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포덕 72년(1931)에 농민공생조합(農民共生組合)을 별도로 조직하여, 포덕 74년에는 지방공생조합의 수가 180여 개소에 조합원수 5만여 명, 조합 총자본 30여 만 원에 달하게 되었다. 특기할 것은 농민공생조합 평양지부에서는 포덕 72년에 농민고무 공장을 설립, 매일 1500켤레의 ‘농’ 자표 고무신을 염가로 생산 공급하고 그밖에 공동경작운동을 전개하는 등 우리나라 농민주도의 민주적 농협운동의 원조가 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4) 4) 어린이운동
천도교는 어린이 운동을 위하여 포덕 62년(1921) 5월 1일 청년회 내에 천도교소년회를 창립하고 전국 순회강연을 전개함으로써 우리나라 최초로 소년운동을 제창하였다. 즉 소년운동의 선구자인 김기전, 방정환 두 분에 의하여 ‘어린이 정서 함양’ ‘청소년의 윤리적 대우와 사회적 지위’를 위한 운동을 천도교의 인내천 정신에 맞추어 전개시켜 나갔던 것이다. 아울러 방정환 선생이 ‘어린이’라는 호칭을 처음으로 만들어 어린이운동을 통해서 이를 사회적으로 보편화시켰다.
그리고 다음해인 포덕 63년(1922) 5월 1일, 천도교소년회 창립 1주년을 맞아 이 날을 ‘어린이의 날’로 선포하고 역사적인 첫 어린이날 행사를 대대적으로 시행하였다. 즉 오늘 우리나라에서 행해지고 있는 ‘어린이 날’은 바로 이렇듯 천도교 어린이 운동에 의하여 비롯된 것이다. 이후 이를 범사회적 운동으로 확산하기 위하여 포덕 64년(1923) 4월 17일 다른 종교의 소년단체와 연합하여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 협회본부를 천도교당 안에 설치하여 매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선포하는 동시 세계 최초의 ‘어린이 헌장’이라 할 수 있는 ‘소년운동의 기초조항’을 선포하게 되었다.
한편 이 운동의 일환으로 「어린이」지를 월간으로 발간 보급하였는데, 「어린이」지는 포덕 64년(1923) 3월 20일에 창간하여, 포덕 75년(1934) 7월까지 통권 122호까지 내고 정간되었다가 해방 후 통권 137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이 「어린이」지는 천도교의 인내천사상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 자유를 이념으로 하여 어린이를 민족 장래의 주인공으로 인식하고, 어린이에 대한 재래의 비인간적 폐습을 혁신시키는 동시에, 어린이 운동 및 이를 보다 정서적으로 융화 발전시키는 아동문학 창달에 크게 기여하게 된다.
(5) 5) 여성운동
천도교의 인내천 종지는 시천주(侍天主) 사상을 근간으로 한 것으로, 반상(班常), 노소(老少), 남녀(男女)의 평등주의를 내포하고 있는 사상이다. 그러니 만큼 남녀평등이라는 여성운동이 천도교에서 비롯됨은 당연한 귀결이 된다. 특히 해월신사의 「내수도문(內修道文)」 등의 법설은 일찍이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매우 중요하게 나타낸 천도교의 가르침들이라고 하겠다.
천도교는 바로 이와 같은 스승님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포덕 65년(1924)에 천도교내수단(天道敎內修團)이라는 이름으로 여성 단체를 조직하여 대대적인 여성운동을 펼쳐나갔다. 그 후 천도교의 여성운동 단체는 그 명칭이 내성단(內誠團), 부인회, 여성회 등의 이름으로 바뀌면서 일제 강점하 민족의 암흑기에 여성의 지위향상과 사회 참여 등 여성의 적극적인 활동을 강조하며 오늘까지 80년의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그 동안 천도교의 여성단체는 전국에 지방조직을 두고 주로 생활혁신과 신여성상(新女性像)의 정립을 위해 많은 활동을 하는 한편, 「부인」과 「신여성」이라는 월간 여성잡지를 통하여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선구적 역할을 담당해 왔다.
「부인」 잡지는 내수단이 조직되기 앞서 포덕 63년(1922년) 6월부터 천도교청년회 여성부문운동의 일환으로 발간되기 시작하여, 포덕 64년 9월까지 통권 16호를 발행하다가, 그 해 9월부터 「신여성」으로 이름을 바꾸어 포덕 75년(1934) 8월까지 통권 38호를 발간하였다(포덕 67년~포덕 기년까지는 「별건곤(別乾押)」에 통합). 「부인」지 또는 「신여성」지는 ① 생활개선 ② 가정의 낙원화(樂園化) ③ 도덕과 미풍의 조성 ④ 자녀의 교양 ⑤ 고상한 취미 고조 등에 힘쓰면서 낙후한 한국여성의 교양을 높이고 여성의 사회진출과 여권신장 및 의식계발에 선도적 역할을 하였다.
(6) 6) 신교육운동
보수적 민족주의가 한학위주(漢學爲主)의 구학문(舊學問)에 집착하면서 선진문물을 수용하는 신교육을 외세에 추종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고루한 태도를 보인데 반하여, 천도교의 진보적 민족주의는 신교육 운동에 누구보다도 앞장을 서는 열의를 보였다.
천도교 3세 교조인 의암성사는 일본 망명시 64명의 국내 유수한 젊은이를 일본에 유학시킨 바 있다. 이러한 천도교의 교육에 대한 열의는 「황성신문」(광무10년 2월 14일자)에 ‘사손병희씨 열의교육(謝孫秉熙氏熱意敎育)’이란 논설이 실린 것만 보아도 천도교가 신교육운동에 얼마나 많은 심혈을 기울였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천도교는 보성전문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하여 용산에 양영 학교와 선덕여학교, 마포에 보창학교와 삼호보성소학교, 청파동에 문창보통학교, 청주에 종학학교, 안동에 봉양의숙, 선천에 보명학교, 전주에 창동학교, 대구 교남학교와 명신여학교 등 31개 학교를 운영하는 한편 전국적으로 야학강습소를 개설하여 문맹 퇴치 등 민중교육 내지 민족교육에 크게 공헌하였다.
이렇듯 민족 교육을 위한 천도교의 신교육 운동은 민족의 암흑기에 민족의 의식개혁과 새로운 세계문명을 깨우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상과 같이 소략하게 기술한 천도교의 신문화운동의 특성과 그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간추릴 수 있다.
첫째, 개벽사상을 배경으로 낡은 문화의 청산과 새로운 민족문화의 창조를 추구하여 낡은 사상과 제도와 인습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치관과 인간관의 정립으로 문화혁신을 도모하였다.
둘째, 인내천 사상을 배경으로 한 인간주체의 신문화창조를 추구하여 인간이 물질이나 정신의 속박에서 벗어나도록 인간회복 내지 인격해방에 앞장을 섰다. 따라서 전근대적인 봉건사상을 배격하고 배금주의에 빠지는 자본주의 내지는 유물사관의 사회주의를 다 같이 부정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셋째, 보국안민사상을 배경으로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민족 전통문화를 살리는 민족주체성에 투철하면서 동시에 서구의 문물을 진취적으로 수용하는 입장을 나타냈다.
넷째, 민중을 대상으로 민중을 위하고 민중을 바탕으로 하는 민중문화운동으로서의 특성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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