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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해방 공간과 청우당(靑友黨)의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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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dongmin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807회   작성일Date 22-07-20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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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8·15 해방 이후 부활된 천도교청우당은 해방공간의 좌·우분열 속에서 편좌(偏左)·편우(偏右)를 배격하면서 민족분열을 야기하는 남북의 단독정부 수립을 극력 반대, 오로지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투쟁하였다. 

     

    8·15해방 후 우리나라는 일제치하에서 벗어났으나 전승국(戰勝國)인 미·소 두 나라에 의하여 국토가 남북으로 분단이 되고, 외세(外勢)를 추종하는 세력들이 득세를 하면서 민족주의 세력이 다시 밀려나게 되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때 근대적 한국민족주의의 주류인 천도교는 천도교청우당을 부활시켜 천도교의 보국안민 이념을 추구하는 한편 3·1운동의 정신을 계승하여 외세에 의한 남북분열을 저지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포덕 86년(1945) 8·15 후 소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우리나라의 신탁통치를 결의하자 이에 대한 찬반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포덕 87년(1946)부터 다음 해까지 한국의 통일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놓고 미·소 공동위원회가 두 차례에 걸쳐 열렸으나 끝내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 포덕 88년(1947)에 유엔총회에서 ‘남북자유총선거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가결하자 북한은 이를 반대하여 김일성 중심의 공산정권 수립을 단독으로 진행하였고, 남한에서는 북한이 자유총선거를 거부함에 따라 이승만이 중심이 되어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남북이 각기 정부를 따로 세우게 될 경우 한국은 완전히 남북으로 분열되어 동족상잔의 비운을 면치 못할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긴박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천도교는 남북통일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곧 ‘남북분열저지운동’과 ‘청우당(靑友黨)운동’이다.

     

    일제의 패망과 함께 해방 공간을 맞은 우리나라는 각종 이념과 주의에 의한 정당과 정치단체가 우후죽순처럼 난립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천도교에서는 포덕 86년(1945) 8·15해방 다음 달에 천도교청우당을 부활하게 된다. 이때 부활된 청우당은 단지 종교적 활동만이 아니라 천도교의 이념에 따라 ‘신국가건설’을 위한 정치적 활동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후 청우당은 당의 정책 설정을 위하여 천도교의 교리와 역사 및 현실인식에 기초하여 정치이념을 수립한다. 이러한 정책의 수립에 따라 천도교청우당은 포덕 86년(1945) 10월 31일 제1차 전당대회를 통하여 ‘민족통일기관 결성 촉진’을 결의하였고, 이어서 12월 15일에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유교, 천주교의 각각 대표 100명씩을 연합하여 조선독립촉성을 위한 연합발기대회를 열고, 20일에는 조선독립의 완성을 촉진하자는 의미로 6개 종단을 모아 조선독립 촉성 종교단체연합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포덕 86년 말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이에 반대하여 성명서를 발표하고.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최후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한다. 이후 조선공산당이 신탁통치를 찬성하자, 포덕 87년(1946) 1월 16일 조선공산당을 비판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즉 청우당은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함께 행동할 것을 천명하고, 포덕 86년 12월과 87년 1월 반탁운동을 전개해 나감으로써 민족 독립과 해방에 의거한 정치 활동을 펴나갔던 것이다.

    이후 좌·우 분열이 일어나게 되자, 포덕 87년(1946) 2월 9일 천도교청우당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고 독립국가 건설을 위하여 정치적 기본노선을 이탈한 편좌(偏左), 편우(偏右)의 모든 경향을 배격하고 민족적 대동단결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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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포덕 87년 3월 중순, 미소공동위원회(美蘇共同委員會)가 개최되는 때에 즈음하여, 미·소 양국의 군대 철수와 내정(內政) 간섭의 배제를 미군정 당국에 요구하기도 한다. 즉 천도교청우당은 ‘남북통일, 좌우합작을 통한 임시정부 수립과 신탁통치 반대’라는 기본 노선을 견지하며, 이를 추진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그 활동을 펼쳤던 것이다.


    또한 포덕 88년(1947) 1월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에 즈음하여 이승만과 한민당 계열의 인사들이 반탁운동을 전개하며 단독정부의 수립을 기도하자, 청우당은 이를 강력하게 반대하는 등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촉구하게 된다. 그러나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의 정책이 미군정과 한민당 등의 우익계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여 청우당의 주요 간부들이 검거되기도 한다.


    이후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의 수립을 이룩하고자 했던 천도교청우당의 염원은 미군정이 단독정부 수립을 희망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단독정부가 수립된 후인 포덕 90년(1949) 8월 10일 “북로당과 북조선천도교 청우당의 지령을 받아 천도교 내에서 남조선 천도교의 중심 세력을 분리시키고 북한 청우당 세력을 부각시키며, 파괴·암살을 위한 지하당원”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당원 30여 명이 검거되기도 한다. 그리고 초지일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했던 남조선 천도교 청우당은 포덕 90년(1949) 12월 26일 이승만 정권에 의하여 ‘정당에 관한 규칙’에 의거하여 강제로 정리·해체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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