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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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공주(公州), 삼례(參禮), 광화문(光化門), 보은(報恩) 등지에서 대신사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伸寃)하고, 동학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도록 촉구하는 대집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매우 평화적이고 대중적인 방법으로 이루어진 최초의 민주적인 시위였다.
천도교의 1세 교조인 수운대신사가 대구 장대에서 참형 당한 이후, 당시 동학교도들은 관의 지목과 탄압 속에서 매우 힘든 삶을 살아가야만 하였다. 이렇듯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대신사로부터 도통(道統)을 이어받은 해월신사는 지속적으로 교단을 정비하고 교도들을 모아들여 포덕 30년대에는 그 교세가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러한 시기를 맞아 해월신사는 공주(公州), 삼례(參禮), 광화문(光化門), 보은(報恩) 등지에서 대신사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伸寃)하고, 동학을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도록 촉구하는 대집회를 열었다. 즉 교조신원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치게 되었던 것이다.
이때에 펼쳐졌던 집회는 매우 평화적이고 또 합리적인 것으로써,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민의(民意)를 집결시킨 집회로 평가되고 있다. 즉 매우 평화적이고 대중적인 방법으로 당시의 팽배된 민의를 결집시켜 중앙정부에 건의하였던 최초의 민주적인 집회이며 시위였던 것이다.
그러나 가장 규모가 컸던 마지막 보은취회(報恩聚會)를 전후(前後)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함께, 당시 부패한 정치에 대한 개혁의 요구와 반왜양(反倭洋), 곧 당시 침략의 마수(魔手)를 뻗치고 있던 일본과 서양에 대한 반외세(反外勢) 운동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볼 수가 있다.
따라서 교조신원운동은 단순히 동학 교조인 대신사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伸寃)하기 위한 운동이었다기보다는, 당시의 팽배된 민의(民意)를 또 결집시켜 부패한 당시 정권에 대하여 개혁을 촉구했던 매우 의미 있는 민중운동이었으며, 나아가 열강의 침략 속에서 위기를 겪고 있던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반외세의 기치를 높이 세웠던 매우 의미 있는 민족운동이었다고 하겠다. 바로 이와 같은 면에서 교조신원운동이 지닌 민중·민족운동의 의의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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