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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갑오동학혁명(甲午東學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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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dongmin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44회   작성일Date 22-07-20 12:13

    본문

    1.1.1. 동학혁명은 반봉건 반침략주의의 기치 아래에 일어난 혁명이며, 동시에 새로운 차원의 후천 세상을 열어가려는 동학도의 또 다른 열망이기도 했다. 동학군은 전주성을 무혈점령한 후 호남 일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역사상최초의 민정(民政)을 실시했다.

     

    포덕 35년(1894, 갑오년) 1월 10일 전라도 고부(古卓)에서 동학의 접주(接主)인 전봉준(全琫準)이 고부 군수 조병갑의 수탈과 학정을 견디지 못하고 수천 명의 군중을 지휘하여 고부 관아를 습격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바로 이 사건이 갑오동학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렇듯 동학도(東學徒)를 중심으로 민중 봉기(峰起)가 일어나자, 이를 평정하기 위해 조정에서 보낸 안핵사(按覈使) 이용태는 무고한 백성을 동학도로 몰아 잡아 매질하고, 재물을 약탈하며 불 지르고 부녀를 겁탈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마침내 전라도 일원의 동학도들은 혁명의 기치를 올리게 된다. 고부의 전봉준을 비롯하여 무장의 손화중, 태인의 김개남, 금구의 김덕명 등 각지의 접주들이 무장에서 봉기하여 3월 21일 동학군을 고부 백산으로 이동 집결시켜 드디어 혁명의 일전(一戰)을 결의하게 된다. 동학군은 격문(檄文), 창의문(倡義文), 행동강령 등을 내세우고 전봉준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하여 오색의 각 포별 군기를 휘날리며 제폭구민(除暴救民), 척양척왜(斥洋斥倭)를 표방하고 일제히 궐기했던 것이다.

    동학군이 고부로 진격하자 안핵사 이용태는 혼비백산하여 도망하였다. 동학군은 이어서 태인과 부안을 점거한 후 도교산으로 이동하였다가 4월 7일에 황토현에서 대승을 올리고 10여 일만에 정읍·홍덕·고창을 점거하게 된다.

    동학군은 무고한 백성에게 피해가 없도록 12개조 군율(軍律)을 세워 군기를 엄하게 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민중의 호응을 받았고, 그 세력이 날로 증가하여 연이어 무장·영광·함평을 점거하고 4월 23에는 장성의 황룡촌(黃龍村) 접전에서 홍계훈의 경군(京軍)을 대파하였다. 드디어 동학군은 4월 27일 전주를 무혈점령함으로써 호남 일대를 장악하여 서울로의 진입을 눈앞에 두게 된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관군은 병력 지원을 조정에 호소하게 되었고, 나약한 조정 대신들은 청국(淸國)에 원병을 청하는 민족 반역을 범하게 된다. 이리하여 청국군 2천여 명이 5월 5일과 7일에 아산에 상륙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일본은 천진조약(天津條約)을 내세워 일본군 7천 명을 5월 6일 인천에 상륙시켜 서울로 진주하였다.

    전주에 입성한 동학군은 호남 일대를 제압하고 서울로 북상(北上)하려다가 청·일 양국군이 조선에 개입을 할 구실을 주지 않기 위하여 북상을 중단하는 동시 관군과 협상을 개시한 끝에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 실행과 동학 집강소(執網所) 설치를 내용으로 하는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성립시키고 5월 8일에 전주성을 관군에게 양도하였다.

    당시 동학군은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일일이 엄중하게 징계할 것”, “횡포한 부호(富豪)들은 엄징할 것”, “노비문서는 불태워 버릴 것”, “7종의 천인차별(賤人差別)을 개선하고 백정 머리에 쓰는 평량갓은 벗겨 버릴 것”, “청춘과부의 재가를 허용할 것” 등의 개혁적인 폐정개혁안 12개 항목을 제시, 집강소를 통해 이를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우리나라의 주체적 근대화의 시발로, 그 의미가 매우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동학군이 전라도 53개 군현(郡縣)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자체적으로 민정(民政)을 실시한 것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지방자치제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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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와 같이 매우 주체적이고 자립적으로 평화적인 방법에 의하여 개혁을 진행시키고 있는 동안, 동학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상륙한 일본과 청나라는 서로가 패권을 잡기 위하여 한반도를 무대로 청·일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전세(戰勢)는 일본군의 우세로 기울어졌고, 일본군은 재빨리 왕궁을 점거하고 고종(高宗)을 사실상 포로로 하여 일본의 괴뢰 내각을 출범시켜 소위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일본군의 침략 사실이 동학군에 전해지자 동학군은 대열을 다시 가다듬어 전주를 재점령하고 북상을 기도하게 된다. 마침내 9월 18일 해월신사의 친명(親命)으로 전국의 동학 접주를 충청도 청산(靑山)으로 모이게 하여 대일항전(對日抗戰)의 총동원령(기포령)을 내리게 된다. 이리하여 동학군은 전국에 걸쳐 339 지방의 포(包)가 동원되었고, 수십만의 대군을 형성하여 삼남 일대와 충청도 동남부를 이미 장악하고 10월에 이르러 논산에 동학군 주력부대가 집결하여 공주를 향해 북상하였다.

    동학군은 목천(木川) 세성산(細城山) 싸움에서 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으나 주력부대는 공주 이인역 옥녀봉에서 관군을 대파하고 봉황산에 이르러 10월 22일부터 공주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대혈전을 전개하게 되었다. 공주 우금치 전투는 무려 사오십 차례나 우금치 고개를 뺏고 빼앗기는 시산혈해(屍山血海)의 대혈전이었다. 그러나 동학군은 일본의 막강한 신무기와 화력을 당할 수 없어 11월 11일 우금치 고개를 시체로 메우고 천추의 한을 남긴 채 처참하게 패퇴하였다.

    그 후 일본군은 동학을 뿌리 채 없애려는 의도로 악착같이 추격하여 무차별 토벌을 감행하였다. 이리하여 동학군은 충주·홍천·하동 그리고 황해도와 평안도 상원 등 도처에서 줄기차게 일어나 싸웠으나 처절한 전투 끝에 무려 30여 만 명이 무참히 희생당한 채 좌절되고 말았다. 그 후 포덕 39년(1898)에 해월신사가 관군의 추적 속에 체포당하여 처형을 당하였으니, 향년 72세였다.

    동학혁명은 반봉건 반침략주의의 기치 아래 일어난 혁명이며, 동시에 새로운 차원의 후천 세상을 열어가려는 동학도의 또 다른 열망이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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