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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갑진개화혁신운동(甲辰開化革新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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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dongmin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556회   작성일Date 22-07-20 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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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 당시 진보회는 전국 360여 군에 지방조직을 설치하고, 정계에 큰 바람을 일으키며 민폐 제거와 무명잡세혁파(無名雜稅革罷), 나아가 부패한 정부를 탄핵하며 교육과 산업의 부흥 등을 주창하였다.

     

    갑오동학혁명 이후 한국은 청·일 전쟁으로 청나라의 예속을 벗어나면서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이 한반도 안에서 각축전을 벌이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던 의암성사는 노일전쟁이 일어날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동학의 조직을 동원하여 먼저 정부를 개혁하는 동시에 개화혁신운동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리하여 의암성사는 이인숙으로 하여금 먼저 정부에 건의하여 정치를 개혁할 것을 호소하였다. 그러나 부패 무능한 정부당 국은 나라의 운명이 이에 달린 줄은 생각지도 않고 오히려 이 글을 올린 이인숙을 체포하려 했다.

    포덕 45년(1904년) 2월에 드디어 노·일 전쟁은 터졌다. 의암 성사는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동학의 간부들을 일본으로 불러 민회(民會)를 조직하도록 지시하였다. 우리나라로 돌아온 간부들은 민회의 이름을 대동회(大同會)라 하고 비밀리에 각 지방에 조직을 펴나갔다.


    이어 4월에 박인호·홍병기 등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의암 성사에게 그 동안의 국내사정을 보고하자. 의암성사는 이르기를 “그대들은 본국에 돌아가 도인으로 하여금 일제히 상투머리를 잘라 단발(斷髮)하게 하라. 단발의 목적은 첫째, 세계문명에 참여하는 표준이요, 단결을 굳게 하여 마음과 뜻을 일치하게 하는 것이니…… 우리가 단발을 한 후에라야 기대하는 일이 성공하리라”고 지시하였다.


    이 지령에 따라 7월부터 대동회를 중립회(中立會)로 명칭을 바꾸고 각 지방에 조직을 강화하려고 하였는데, 이때 관헌의 탄압이 극심하여 뜻대로 안되었다. 일이 여의치 못하자 의암성사는 권동진·오세창 등과 상의하여 회의 명칭을 다시 진보회(進步會)로 바꾸고 강령을 발표하게 한다. 또한 강령의 발표와 함께 종래의 산발적인 모임을 지양하고, 백만도중(百萬徒衆)이 8월 30일 일시에 개회(開會) 궐기하도록 지령을 내렸다.


    이리하여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단발흑의(斷髮黑衣)로써 죽음을 무릅쓰고 정부개혁과 국정 쇄신을 부르짖었으니, 당시 상투를 자른 사람이 하루 사이에 만 명을 넘고 며칠 사이에 근 20만 명이나 참가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진보회의 깃발이 휘날리게 되었다. 당시 진보회는 전국 360여 군에 지방조직을 설치하고, 정계에 큰 바람을 일으키며 민폐제거와 무명잡세혁파(無名雜稅革罷), 나아가 부패한 정부를 탄핵하며 교육과 산업의 부흥 등을 주창하였다.


    그러나 진보회의 정체가 과거 동학혁명을 주도했던 동학의 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 정부는 당황한 나머지 군대를 출동시켜 진압하는 한편 일본군과 교섭하여 지난날 갑오동학혁명 때와 같은 동학 토벌의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각 지방에서는 충돌사건이 빈발하고 발포, 구타, 살상 등의 공포분위기가 조성되었다. 특히 평안도 태천에서는 수백 명의 교인이 관군에 쫓기어 고치강에 빠져 익사 당하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이때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는 일본의 보호 밑에 겨우 간판만 유지하고 있었는데, 진보회가 전국적으로 크게 일어남을 보고 진보회 회장인 이용구에게 ‘정부에서 갑오년 동학당 토벌 때와 같이 일본군과 합세해서 진보회를 소탕할 방침인 듯하니 진보회가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일진회와 합동하는 길뿐”이라고 유혹하였다. 이에 이용구는 정부의 진보회 탄압을 빌미로 동학을 배신하고 일진회 요구대로 이 해 10월 13일 진보회를 일진회와 합병, 친일단체 일진회로 둔갑시켰다.

    이용구의 배신을 뒤늦게 알게 된 의암성사는 포덕 46년(1905년) 12월 1일을 기해 동학을 천도교라 선포하는 동시 천도교와 일진회간의 일체 관계를 끊게 하고, 이용구 등 친일파 일당을 천도교에서 출교 처분하였다.


    갑진년의 이 개화혁신운동은 이용구의 배신으로 비록 좌절되었으나, 우리나라의 근대사에 있어서 놀라운 민권의 신장과 문화혁명의 개혁의지를 보인 대서특필할 큰 의의를 지닌 개화혁신운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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