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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3·1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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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dongmin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748회   작성일Date 22-07-20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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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 3·1 운동은 청사에 빛나는 거족적 독립항쟁이었다. 이 운동은 동학이 주축이 되었지만, 민족의 이름으로 교파와 종교를 초월하여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여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천도교는 의암성사의 지도 아래 100년 가까운 기간을 여러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를 해왔었다. 일제로부터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하여 한편으로는 힘을 기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독립운동을 거사할 준비를 했던 것이다.


    이를 위해 우이동에 봉황각(鳳凰閣)을 건립하여 지방 간부 약 500명을 뽑아 7차에 걸쳐 수련을 실시하여 강한 종교적인 정신력과 함께 독립정신을 기르게 하였고, 훗날 이들로 하여금 각 지방에서 독립운동 거사를 주동하게 하였다. 또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위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중앙대교당 신축기금의 명목으로 자금을 마련토록 하였다. 그런가 하면, 전국의 교도로 하여금 기미년 1월 5일부터 2월 22일까지 49일간 광복특별기도를 행하게 하였다. 이러한 준비와 함께 전국 교구에 등사기를 마련하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면서 전민족(全民族)의 이름으로 독립운동을 거사할 방침을 세워나갔다.


    이리하여 포덕 60년(1919) 1월에 의암성사 자택에서 권동진·오세창·최린 등이 여러 차례 모여서 회합한 끝에 거족적(擧族的)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합의한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에 임하는 ① 대중화 ② 일원화 ③ 비폭력의 세 가지 운동원칙을 확정하였다.

    이후 최린은 2월 초 자택에서 송진우·현상윤·최남선 등과 회합을 갖고, 앞서 세운 독립운동계획에 합의하였다. 그리고 나흘 후 다시 계동 중앙학교에서 네 사람이 재차 회합하여 숙의한 결과, 구 한국시대 요로 인물을 설득하고, 기독교와 함께 민족대표 수십 인의 명의로 독립을 선언하기로 하며, 독립선언서 및 의견서 등 서면 기초는 최남선이 담당하도록 합의하였다.


    이어 최남선과 송진우는 구 한국시대 요인을 찾아 각각 교섭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였다. 한편 최남선은 기독교와 교섭하기 위하여 정주의 이승훈을 만나고자 현상윤으로 하여금 상경하도록 전언을 의뢰하였다. 현상윤은 다시 김도태 등에게 부탁, 이의 연락을 받은 이승훈이 2월 11일에 급거 상경하게 된다.

    한편 이 무렵 재일 동경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으로 국내에서 일본 관헌의 경계가 자못 심하여졌다. 이때 최남선은 지목을 피하기 위하여 이승훈과 직접 만나지 못하고 송진우로 하여금 만나 상의하게 하였다. 송진우는 이승훈에게 천도교측의 독립운동 계획을 말하고 기독교에서 같이 합류하기를 권하자 쾌히 찬동하였다.

    이승훈은 다음날 선천으로 내려가 기독교의 이명룡 등 여러 인사들과 회합하여 찬동을 얻고, 재차 상경하여 기독교청년회에 있는 박희도와 상면하여 기독교측의 독자적인 독립운동 모의에 참석하였다. 모의한 결과는 ① 일본정부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기로 하되 ② 경성 및 지방에서 청원서에 서명할 동지를 구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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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운동을 영도한 의암성사 손병희 선생의 동상(탑골공원)


     그 후 2월 21일에 최남선은 이승훈을 만나 그와 함께 최린을 방문하여 의견을 교환하게 되었는데, 최린은 기독교측의 독립청원서 제출 계획을 듣고 독립청원보다 독립선언이어야 한다고 역설하면서 교파가 다르다 하여 서로 다르게 하여서는 안 된다고 간곡하게 합류할 것을 권유하였다. 이에 이승훈은 다른 동지와 협의하여 회답하기로 약속하는 한편 독립운동비조로 자금을 마련해 주도록 요구하고 헤어졌다. 이에 최린은 의암성사의 승인을 얻어 운동자금 5천원을 22일 이승훈에게 넘겨주었다.


    그 후 이승훈은 함태영과 함께 기독교측 대표로서 천도교측 섭외대표인 최린과 여러 차례 협의한 끝에, “독립선언은 3월 1일 오후2시 낙원동의 탑골공원에서 행한다.” “독립선언문을 민중에게 살포하는 동시 학생단과 민중으로 하여금 만세시위 행진을 감행토록 한다.”는 등의 7개 항목의 구체적인 독립운동 방법을 합의하였다.


    이리하여 민족대표 33인이 정해지고, 2월 28일 저녁 의암성사 댁에서 민족대표가 회동하여 다음날 3월 1일의 거사에 대하여 마지막으로 합의한 결과 독립선언서 낭독을 태화관에서 하기로 변경한 것 외에는 모두 당초 계획대로 재확인하였다. 이때 민족대표 33인은 천도교 15명, 감리교 9명, 장로교 7명, 불교 2명이었다.

    드디어 3월 1일을 맞아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이 불렀다. 때를 맞추어 파고다 공원에서는 남녀 학생들이 모여 일반 민중과 더불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드높게 외치면서 시가(市街)로 쏟아져 나와 시위행진을 감행하였다.


    같은 날 평양과 해주, 의주, 길주, 원주, 서산, 전주, 진주 등지에서 거사하고, 연이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성난 파도와 같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 민족 모두가 일어나 일본군경의 총칼 앞에 맨주먹으로 독립만세를 부르며 쓰러지고 또 쓰러지면서도 연이어 일어났다.


    이 운동으로 민족대표를 비롯하여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투옥 당하고 이름 없는 많은 애국지사가 학살당하였다. 특히 천도교는 3·1독립운동으로 인하여 의암성사를 비롯한 중요 간부 대부분이 투옥되었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에 의해 중앙총부가 포위 점거되어 기능이 마비되고 여러 지방교구가 폐쇄되는 등 극심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3·1운동은 청사에 빛나는 거족적 독립항쟁이었다. 천도교이라는 한 종단이 그 주축이 되었지만, 민족의 이름으로 교파와 종교를 초월하여 모두 한 마음 한 뜻으로 모여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것은 인류 역사에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가열되자 해외에서도 망명지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이러한 독립열기가 한데 모아져 그 후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하게 되었다. 또한 이렇듯 숭고한 3·1 독립정신은 훗날 대한민국을 수립할 때, 건국정신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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