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6·10 만세와 천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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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10만세 운동은 당시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을 주장하던 동학 민족주의 노선이 최초로 연합을 시도한 운동이며, 3·1 독립운동 이후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운동의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조선조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純宗)이 승하(昇遐)하자 포덕 67년(1926) 순종의 인산일(因山日)인 6월 10일을 기하여 3·1독립운동과 같은 전민족적인 시위운동을 계획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6·10만세 운동이다.
이 운동은 조선공산당의 발의로 학생들이 중심이 된 독립운동이었다. 그러나 좌파의 힘만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한 사회주의 진영이 당시 천도교 내의 민족주의 세력인 천도교청년동맹(天道敎 靑年同盟)의 박래원(朴來源)·손재기(孫在基) 등과 연합하여 그 계획을 구체화시켰다.
천도교측에서는 전국의 개벽사 지사와 농민단체, 노동단체, 청년단체, 천도교 지방교구 등을 중심으로 6월 10일에 일제히 봉기할 수 있도록 계획을 수립하는 한편, 10만 장의 인쇄물을 준비하여 손재기의 집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거사(擧事) 직전에 일본 경찰에 탐지되어 박래원을 비롯한 천도교측의 주동자는 물론 천도교의 간부 대부분이 연행되었고, 지방의 요시찰 대상자들도 예비 검속을 당함으로써 이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이때 전국 각지를 통하여 검속된 사람은 2천여 명이나 된다. 그 중 형을 받은 사람은 50여 명이었고, 고문 치사된 사람이 1명, 옥사한 사람이 1명 등 희생자가 발생했다. 거사 당일에 사용될 인쇄물은 「대한독립만세」 등 다섯 종류로, 대한민국의 독립과 이를 위한 민족의 단결을 그 내용으로 담은 것들이었다.
6·10만세 운동은 비록 실패로 끝이 났지만, 당시 사회주의 세력과 비타협을 주장하던 천도교 민족주의 노선이 최초로 연합을 시도한 운동이며, 3·1독립운동 이후 독립운동사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운동의 하나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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