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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남북연석회의와 허경일 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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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dongmin
    댓글 댓글 2건   조회Hit 1,396회   작성일Date 22-07-20 14:54

    본문

    “한울님이 가르쳐 준 거죠. 사람이 한 거 아니에요”

    -남북연석회의와 허경일 선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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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경일 선도사



    허경일(許景日) 선도사는 평안북도 신의주 수진면 출생으로 계대교인이다. 포덕 89년(1948) 평양에서 열린 남북지도자연석회의에 천도교 학생대표로 참석, 회의가 무산되자 이 자리에서 결론을 내야한다고 웅변을 토하여 회의장을 숙연하게 하여 일약 유명인사가 되었다.

    포덕 67년(1926)년 10월 30일 평안북도 신의주 수진면 풍양동에서 태어났으며 원적은 신의주시 풍서동이다. 진성당眞誠堂 허경일 선도사는 83세를 일기로 포덕 149년(2008) 7월 7월 환원하여 유해는 남양주 에덴공원에 안치되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한 천도교 신앙

    “우리 집안이 남다른 공부 열이 있어. 우리 집이 한 이백 석 했어요.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아이들을 다 일본 보냈거든. 일본을 알아야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고모들, 삼촌들도 다 일본 다녀왔어요. 증조부 때부터 그게 모토였어요. 아버지가 스물일곱엔가 동경에 5년 있다 오셨을 거예요.”

    허경일 역시 집안의 남다른 공부 열 덕분에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일제시대 해방되기 전에는 동경에서 동경 여성회 지부를 했어요. 고등학교 학생이었는데, 한국 학생 조직을 결정하자 그래서 서울에 보고도 하고 했어요. 동경지부라고 해서.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10월 10일이었는데, 내가 일본에서 공부하다가 여름방학에 왔는데, 이제 가면 날 못 볼거다. 그러니 날 볼 거면 개학이라도 가지마라 하셨어요. 내가 열댓 살 때였을 거예요.”

    철저한 천도교인이었던 부친에 대한 기억은 일제의 고문으로 각인되어있다.


    “남동생 이름을 ‘신조’라고 지었는데 이것 때문에 아버지가 많은 고생을 했어요. 새 신新, 아침 조朝, 그러니까 일본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조선을 만들겠다는 뜻이지, 하면서 트집을 잡아요. 고문을 당하고 시체가 되다시피 해서 집에 오시면 얼마 못 사시겠다 싶은데, 며칠 있다 살아나고 그리고선 평생을 매 맞아서 죽다시피 해서 나오셔서 겨우 사람 구실 할 정도 되면 또 당하고 또 당하고. 일본에서 나오셔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내내 고문으로 돌아가신 거예요.”

    허경일의 부친 허원형은 포덕 61년(1920) 천도교에 입교하여, 동경종리원 종리사와 천도교청년당 의주부 선전위원 등을 역임했다. 허원형이 수차례 고문당하고 서른일곱의 젊은 나이로 환원한 것은 천도교청년당 활동과 조선농민사 등의 활동과 연관되어 있었다. 허원형은 『신인간』제74호(1933.12)에 기고한 ‘공작계에 대한 소고’란 글에서 자신의 활동에 대해 간접적으로 이렇게 표현하였다.


    “우리 천도교를 믿는 사람은 할 일은 크고 큰데 살림은 여지없이 어렵다. 이것이야말로 묵돌불검墨突不黔이요 공석불난孔席不暖이란 옛 사람의 말과 같이 과거의 많은 성력誠力에 의하여 있는 힘을 다 쏟아 붓고 개인의 생활을 돌아볼 생각을 갖지 못한 증거라 하겠다.”

    허경일의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기억을 살펴보면 지금의 천도교가 무엇을 해야 되고 무엇이 부족한 것인지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주변에 천도교 안 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말도 못하게 독실하게들 신앙생활을 했어요. 내가 다섯 살 때 집 옆에다 수련실을 만들어 놨는데 거기서 수련을 한다고 밤을 새웠는데 제가 몸이 둥둥 떴어요. 손이 보이지 않아서 어떻게 된 건가 했는데 공중에 떠 있는 거예요. 아주 기적이 많았어요. 거짓말 같기도 하고 정말 같기도 하고. 그때 천도교는 이런 천도교가 아니었어요. 죽기 아니면 살기로 했어요. 어떻게 그렇게들 했는지. 지금 그때 했던 거 십분의 일만 독실하게 했다면 하루아침에 교세가 부흥했을 거예요.”

       

    허경일은 만년에 자신의 생명을 지탱한 것은 주문이라며, 3.7주문을 장수하는 주문이라고 회고하였다.

     

    “대신사님 말씀이, 21자 주문을 장수하는 주문이라고 하셨습니다. 21자 주문은 장수 주문이에요. 나는 사실 스무 살을 못 넘긴다고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 팔십이 넘었어요. 나는 대신사님만 믿어요. 3.7자 주문은 장수 주문이에요. 그거 안 했으면 벌써 죽었을 겁니다. ‘지기금지원위대강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이걸 무념상태에서 외면 장수합니다. 나는 비위가 없어서 먹으라고 해도 안 먹고 굶었어요. 굶어서 의식을 잃은 게 세 번이에요. 주문 때문에 살았어요. 지금도 주문이 아니면 살지 못해요.”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회고


    요즘으로 치면 일본에서의 조기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해방 전 허경일은 숙전(숙명여대 전신)을 수석 졸업하고 스무 살 무렵 신의주에서 해방의 기쁨을 만끽하고 곧장 서울로 올라가 서울대 사학과에 지원하여 1946년 3월 정식으로 입학하였다. 대학 3학년 때인 1948년 허경일은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허경일의 회고를 그대로 옮겨보자.

    “1948년 서울대학 재학 중일 때 2학년 땐가, 3학년 땐가 전국에서 남북협상대표로 평양에 갈 학생을 뽑은 거예요. 경쟁을 시켰는데, 나는 남북협상에 가면 이런 걸 제안하겠다. 하는 걸 시키는 거예요. 거기서 뽑고 또 뽑고 해서 1차, 2차, 3차 하는데 내가 뽑힌 거야. 지금도 평양에 내 이름이 새겨져있어요. 전국 학생 대표 이름으로 간 거예요. 그 때는 말 잘 하는 걸로 유명했습니다.


    허정숙 씨라고 허건 씨 딸이 있었는데, 그 분이 마지막으로 사회를 봤어요. 모든 일정이 순조롭게 끝났기 때문에 폐회를 선언하겠습니다, 하는데, 내가 손을 들고 제안하겠습니다.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젠 공식 일정이 끝났으니 사석에서 하십시오, 하더라구요. 나는 남한에서 학생대표로 왔습니다. 학생대표로 온 사람을 말도 못 하게 하고 가라고 합니까. 나는 말을 안 하고는 못 가겠습니다. 가서 이런 말을 하라고 해서 왔는데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김일성, 김구 선생 다 지켜보는 가운데 시간은 됐는데 저 학생 발언권을 줄까요. 어떻게 할까요 하고 토론을 하는데 10분은 더 걸렸을 거예요.

    그랬는데 허건 씨가 다르더라구요. 그건 줘야 된다구. 전국 학생대표로 왔는데 한 시간이 되더라도 그건 시간을 줘야 된다구 그러더라구. 그래서 몇 분 합니까, 5분 하라면 5분 하고 10분 하라면 10분 할 테니까 말씀해 주십시오. 했더니 또 들어가서 물어봐요. 그러니까 그 학생만은 시간제한 주지 말래. 어떤 자리인데 내가 말을 길게 하겠습니까. 내가 이런 말 했어요. 참 기가 막혀.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몰라. 지금 생각해도 그땐 지금의 허경이 아니었어요. 참 모처럼 귀한 시간을 주셨는데 반가이 받겠습니다. 이천 명이 모였는데 그렇게 긴 시간은 안 하겠습니다. 내 생각 같아서는 남북협상이 또 되기 어렵습니다. 나는 다시 이 자리가 이루어질까 의심스럽습니다. 앞으로 2차, 3차를 꼭 이루겠다고 말씀해 주십시오 했어요. 그 말 하면 다 한 거 아니예요.


    우리는 그때 느꼈어요. 남침 준비를 다 해놨다는 걸. 얼마 안 있어 쳐들어 왔잖아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어떻게 그런 말을 했냐고 그러더라구요. 내가 폐회를 하시되, 이번 이 끝이 아니다, 반드시 2차, 3차, 4차 열겠다는 걸 약속해 주십시오. 언제 열라고는 못 하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하겠다고 해 주십시오 했거든요.


    김일성이 뜨끔했을 거예요. 남침 준비를 해 놨는데, 얼마나 놀랐겠어요. 그렇다면 오늘 폐회 선언 하십시오. 그러고 나서 회의장을 나오는 데 말도 못 했어요. 내 손 한 번 잡으려고 모두 줄을 섰어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나고. 아무도 그 생각을 못 했는데, 결국 못 열렸잖아요. 한반도가 두 동강 났잖아요. 어떻게 그런 소리를 했는지 몰라. 아주 못 박았거든요. 아무래도 한울님 시키신 것 같애요. 영웅으로 소문이 나고 가는 곳마다 그 얘기를 하고 그랬어요. 한울님이 가르쳐 준 거죠. 사람이 한 거 아니에요. 그걸 누가 가르쳐 주겠어요?


    서울대학에 오니까 교수님들이 모두 와서 내 손 한 번 잡으려고, 어떻게 해서 그런 생각을 했느냐, 일류 교수들이 그랬어요. 학교에 왔더니 유명해졌더라구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사학과에서 일등을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점수를 준 것 같아. 허경일이가 유명해졌지

     

     

    “신성한 교당에 애새끼들이 주르륵, 치워, 치워”


    - 경운학원과 경운유치원

    허경일은 대학을 졸업하고 6.25전쟁이 터지자 대학 친구들이 해군장교가 많아서 진해로 피난 가서 두부장수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부산여중에서 교편생활을 7년을 하다 서울로 올라와 덕성여대 교수직에 있으면서 주옥경 사모님 일을 도와 천도교여성회 활동에도 열성이었다.

    천도교여성회는 포덕 97년(1956) 4월 4일, 천도교내수회를 시대감각에 맞게 천도교부인회로 명칭을 바꾸어 새 출발하였고 이후 포덕 109년(1968) ‘부인회’를 ‘천도교 여성회본부’로 명칭을 변경하게 된다. ‘천도교부인회’ 시절 특기할 것은 ‘경운학원’과 ‘경운유치원’을 경영했다는 점이다.

    주옥경 회장이 원장으로 되어있는 경운학원은 불우한 환경 때문에 정상적인 학업을 밟지 못한 소녀들에게 초등학교 과정을 수업케 하기 위해 포덕 99년(1958) 4월 7일 문을 열었다. 8세부터 20세까지의 소녀와 여성들에게 무료로 매일 오후 7시부터 9시 20분까지 야학으로 3년 동안에 초등학교 전 과정을 수료토록 되어있는 경운학원은 포덕 100년 3월 30일 제1회 졸업식을 거행, 16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그 외 당시 약 150여명의 학생들이 취학하고 있었다.

    그리고 경운유치원(원장 주옥경) 역시 포덕 100년(1959)에 개원하여 포덕 103년(1962)2월 10일 제3회 졸업식을 가진 바 있으나, 부인회는 경운학원과 경운유치원을 모두 계속 운영할 여건이 되지 못하여 부득이 중단하였다. 경운학원과 유치원의 폐교는 경제적인 면과 총부와의 원만한 관계가 유지되지 않았던 것이 이유였다. 허경일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주 사모님 이름을 빌려서 경운유치원을 했지요. 초등학교도 했고, 근 십 년 했지요. 주 사모님은 원장 하셨고. 너무너무 잘 됐지요. 천도교 정식 유치원을 낸 거예요. 그런데 왜 그만두었는지 몰라. 말도 마세요. “신성한 교당에 애새끼들이 주르륵, 치워, 치워” 다 그만두라고 했습니다.”

     

    천도교여성회에서는 처음에는 창도 100주년에 교육기관을 설립하려 진행하던 모금이 중단되면서 대안으로 야간학교를 운영하였고, ‘경운유치원’도 개원하였으나 포덕 103년(1962) 2월 10일 3회 졸업생을 마지막으로 경운학원, 경운유치원은 운영난으로 문을 닫아 교육기관의 꿈이 무산되고 말았다. 성사의 부인이신 주옥경 사모님은 이 일을 두고두고 아쉬워하였다. 당시 주옥경 사모님을 비롯한 여성회원들은 어린이 교육에 열성이었고 천도교단에 정식 교육기관 설립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이에 대해 허경일과 함께 여성회 활동을 하였던 김병화의 자부 오용녀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저녁 7시부터 9시 20분까지 40분씩 세 시간을 6학급 수업을 했는데 일 학급을 6개월씩 3년간 초등학교 전 과정을 마치도록 했어요. 천도교에 교육의 필요성을 실천하신 거예요. 그리고 경운유치원도 설립해서 대교당 2층 성화실에서 허경일 선생님과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는데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허경일 선생님은 밤에 직접 오셔서 가르치셨어요. 허경일 선생께서는 역사공부도 하신 교수셨는데 바른말을 잘하셨죠.


    경운학원 졸업장을 보면 주옥경 사모님 이름으로 되어 있어요. 하지만 재정 뒷받침이 전혀 안 되니 도저히 운영할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안타까워하시며 문을 닫았어요. 어머님(김병화)은 여성회에서 그 모든 일을 다 했어요. 그대로 유지했으면 좋은 학교 하나 만들었을 거예요. 그해 문교부에서 웬만한 학원들을 전부 학교 허가 내줬거든요. 지금 어지간한 학교들은 그때 다 만들어진 거예요. 교단에서 뒷받침만 잘 해주었더라면 지금 굉장한 학교가 됐을 거예요.”

     

    “남이 안 하는 일을 하세요”

    허경일은 이후 천도교 종의원, 수명포 도정, 천도교 연원회 부의장(최초 여성 부의장)으로 활동하면서 교회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만년에 수유도봉교구의 한문글방과 유아원을 운영한 것은 천도교단에서 실패했던 교육기관 설립에 대한 미련 때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고 있는 작금의 시기에 허경일 선도사가 남긴 아래의 말씀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지만, 남북문제에 국한된 이야기만큼은 아닐 것이다.


    “남이 안 하는 일을 하세요. 지금 제일 시급한 것이 남북문제입니다. 말하지 말고 남이 못 한 일을 찾아서 하는 거예요. 표 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남들이 하기 힘든 일을 찾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남북문제를 어떻게 하겠는가, 비용을 많이 들이지 않고, 많은 시간과 힘을 빌지 않고 어떻게 하겠는가를 짜내야 됩니다. 중요한 인물들을 메모해 두세요.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 지금은 모르는 사람이 나중에 유명해지는 수가 있고, 지금은 유명하지만 나중에 흐지부지한 사람도 있지요. 지금은 봐도 모르죠. 항상 그때만 봐서는 안 돼요. 지금 유명한 사람도 많이 기록해 두십시오. 그러면 그 중에서 나타나는 수가 있거든요. 남북문제에서 누가 부각될지 지금은 몰라요.”

     

    참고자료

    『한울님 은덕으로 살아온 내 인생』(2007년, 천도교여성회본부 발행)

    『천도교여성회 70년사』

    『신인간』제74호(1933.12), 허원형 : ‘공작계에 대한 소고’

    『신인간』제648호(2004.8), 이순종 : ‘천도교여성인물사⑧천도교 여성종법사 이야기’

    『한울 마음 여인들, 천도교여성들의 삶과 수도』(2010) 천도교여성회 엮음

    『동학천도교인명사전』(2015, 이동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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