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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읽기 “우리 안의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라!” 안중근의 역사전쟁은 끝나지 않았다---식민지 비판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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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dongmin
    댓글 댓글 0건   조회Hit 3,174회   작성일Date 22-09-03 11:51

    본문

    1907년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전국에서 일어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한다. 그해 7월, 고종이 폐위 당하자 해외로 망명한다. 망명 배경과 경위를 그의 “안응칠 역사”로 알아보자. 

     

    “1907년(정미)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에 돌아와서 ‘7조약’을 늑정(勒定)한 뒤 광무황제를 폐위하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에 2천만 민인(民人)이 일제히 분발했다. 의병이 곳곳에서 봉기했고, 삼천리 강산은 포성으로 뒤덮혔다. 이때 나는 급히 행장을 꾸려서 가족과 이별하고 북간도에 도착하니, 그곳에 일본 병대가 방금 주둔해 와서 도무지 발붙일 곳이 없었다. 그래서 서너 달 동안 각지를 시찰한 다음, 그 곳을 떠나 러시아영토로 들어갔다. 연추를 지나 블라디보스톡에 이르니 거기에는 한국인 4, 5천명이 살고 있었다.”(“안응칠 역사”)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소위 "정미7조약"과 고종황제 폐위 그리고 군대해산이다. 이 일의 주동자가 바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이다. 

     

    1904년 2월 8일, 일본 해군의 려순 기습을 시작으로 러 · 일 전쟁이 발발하였다. 전쟁이 발생하자 그해 3월 이토는 한국을 확실히 단속하고자 국왕 위문 특파대사로 임명되어 대한제국 황제를 배알하고 일본의 입장을 전달하였다. 이토의 영향으로 한국은 5월에 러시아와의 국교 단절을 선언하게 되었다. 이때 안중근은 러-일 전쟁에 대해 “러시아가 이기면 러시아에, 일본이 이기면 일본에 합병될 우려가 있다”고 백암 박은식은 스스로 탄식하였다. 

     

    이토는 1905년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여 일본의 관할하에 두었고, 같은 해 12월에는 한국에 통감부를 설치하여 초대 통감의 자리에 올랐다. 1907년 8월에 히로부미가 동경으로 돌아왔을 때는 마치 개선장군과도 같은 환영을 받았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법령제정권 · 관리임명권 · 행정권 및 일본관리(차관제)의 임명 등을 내용으로 한 새로운 조약안을 제시, 1907년 7월 24일 이완용(李完用)과 이토 히로부미의 명의로 소위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모든 권한을 한 손에 쥔 일제 통감부(나중에 총독부가 됨)는 한국통치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나아가 군대해산을 단행하여 일제에 대항하는 한국의 무력 저항세력을 제거하였다.

     

    제1기 의병은 1895년(을미)은 중요한 해이다.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 등을 강제 시행(을미개혁)에 저항하여 일어난 을미의병(乙未義兵)이며, 제2기 의병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에 따라 일어난 을사의병(乙巳義兵)이며, 제3기는 1907년 한일신협약에 자극받아 일어난 정미의병(丁未義兵)이다.

     

    정미의병은 1907년 8월 1일 한국군대의 강제 해산과 이에 반발한 해산군인들의 대일항전(對日抗戰)에서 비롯되었다. 해산당한 군인들은 군대해산 조칙이 내려진 당일 서울의 시위대(侍衛隊) 대대장 박승환(朴昇煥)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군과 시가전을 전개하면서 대일 항전을 개시하였다. 그 뒤 각 지방의 해산군인들도 잇달아 봉기하였다.

     

    먼저 8월 2일 원주 진위대(原州鎭衛隊) 군인들이 일제히 무기고를 점령한 뒤 그곳 민병과 합세하여 원주시를 장악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여주 주대(驪州駐隊) 군인들도 이튿날 본대에 합류하였다.

     

    다음으로 강화 분견대(江華分遣隊) 군인들이 8월 10일 대일항전에 나서 한때 강화성을 장악하였으나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각처로 분산되었다. 이 밖에도 홍주 분견대, 진주 진위대도 봉기계획을 추진하였다. 

     

    민긍호·박준성·손재규 등 원주 진위대 해산군인들은 각자 의병진을 편성, 강원도·충청북도·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이강년(李康秊)과 신돌석(申乭石) 등은 경상북도 북부 일대에서 각각 항일유격전을 펼쳤다.

     

    다음으로 경기도에서는 허위(許蔿)가 연기우(延基羽)를 부장으로 하는 강화 분견대 군인들을 포섭하여 임진강 유역의 포천·연천 등지에서 강력한 항전 기반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호남지역, 경상남도 안의·거창 방면, 전라북도와 충청남도의 접경지를 중심으로 한 공주·회덕·연산·진잠 등지에서는 김동신이 유력한 의병진을 편성, 활약하였다.

     

    한편, 북한지역에서도 이 시기에 들어와 의병 항일전이 활발하게 펼쳐졌다. 황해도에서는 박정빈·이진룡이 주축이 되어 평산에서 봉기하였고, 평민 출신 김수민 의병진이 경기도 장단에서부터 황해도 서흥 일대에 이르기까지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평안도의 경우에는 김여석(金汝錫) 의병진이 덕천·맹산 일대에서 활약하였으며, 채응언은 함경도·평안도 접경지대에서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함경도 의병항일전은 홍범도(洪範圖)·차도선 등이 삼수·갑산 등지에서 산포수와 광산노동자들을 규합하여 강력한 의병진을 편성하였다. 

     

    최재형(崔在亨)은 고향인 함경북도 경원(慶原)에서 이범윤·엄인섭·안중근(安重根) 등과 함께 의병진을 편성하였다. 이때 동의회와 창의대가 중심이 된 연해주 의병들의 대규모 국내 진공 작전은 1908년 7월에 전개되었다. 즉 전제익(全濟益) 이하 안중근, 엄인섭 등이 인솔하는 200~300명의 연해주 의병이 두만강 대안에 대기해 있다가 7월 7일 강을 건너 경흥군 홍의동(洪儀洞)으로 진격해 들어간 것이 그 시작이었다. 최재형과 이범윤은 국내 진공 작전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다.

     

    안중근은 동의군의 우영장(右營將)으로 국내 진공 작전에 참가하여 한 부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동의회 의병은 최고 지휘관인 도영장(都營將)이고, 그 밑에 좌영장, 우영장을 거느리는 체제이다. 도영장에 전제익(全濟益)을 필두로, 좌영장 엄인섭과 우영장 안중근이 동의군을 이끈 최고 지휘관들이었다. 이 편제에서 보듯이 안중근은 곧 연해주 의병의 핵심 간부로 항일전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야전 지휘관이었다. 안중근은 국내 진공 작전의 일환으로 휘하 의병을 이끌고 1908년 7월 7일 포시예트를 출발하여 두만강을 건넜다. 안중근이 거느린 의병 부대는 도강 후 두만강 대안의 경흥군 홍의동(洪儀洞)에서 항일전을 개시하였다.훗날 안중근이 진술한 통감부 자료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내가 의병(義兵)으로서 실전에 종사한 것은 1908년 음력 6월 5일경...이범윤의 부장이었던 전 경무관 전제익을 대장으로 삼고, 엄인섭은 좌군령장, 나는 우군령장이 되었다. 의병 50여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경흥부로 출병했다.”(통감부 심문 공술자료)

     

    김봉진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안중근의 직책을 종합하면 “참모중장 겸 우군령장”이었다고 본다. 안중근은 1908년 음력 6월에 경흥부로 출병하여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이때 포로로 잡은 적들을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놓아주면서 안중근은 이렇게 말했다. 김봉진(일본 기타규수대학 명예교수)이 쓴 “안중근과 일본, 일본인”(지식산업사 발간)에서 인용하였다. 

     

    “이토의 포악한 정략을 성토하여 세계에 널리 알려서 열강의 같은 감정을 얻은 다음에야 비로소 한을 풀고 국권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른바 약한 것으로 강한 것을 물리치고, 어짐으로 악한 법을 대적함이다.”(김봉진 “안중근과 일본, 일본인”)

     

    이처럼 이토의 포악한 정략이 조선의 강탈에 있음을 간파한 안중근은 1909년 2월 7일,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들어갔고, 곧이어 임시정부 초대 재정총장을 지낸 최재형의 지도 아래 단지회(斷指會, 단지동맹)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때 안중근 등의 단원들은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지목된 이토 히로부미와 매국노 이완용에 대한 암살계획을 세우고, 3년 이내에 이를 성사시키지 못하면 자살로써 국민에게 속죄하겠다며 왼손 네 번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피로써 항일투쟁의 의지를 다졌다. 

     

    이때 왼손 약지를 끊은 안중근은 그 피로써 태극기 앞면에 글자 넉자를 쓰니, ‘대한독립’이었다. 쓰기를 마치고 ‘대한독립만세’를 일제히 세 번 부른 다음 하늘과 땅에 맹세하였다. 장소는 남우스리스크의 연추(煙秋, 얀치헤, 현재의 끄라스끼노)이다. 이곳 연추에 최재형의 집이 있었다. 

     

    마침내 안중근이 10월 19일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하니, 주위에는 이토가 올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안중근은 거듭 확인해 본 바 틀림없는 정보였다. “남 몰래 여러 해 소원하던 목적을 이루게 되다니! 늙은 도적을 내 손으로 끝내리로다!”라고 기뻐했다. 운명의 날은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반 쯤이었다.  

     

    “‘저자가 바로 이토 늙은 도적일 것이다’라고 여겼다. 곧 단총을 뽑아 들고 그 오른쪽을 향해서 네 발을 쏜 다음에 생각해보니 십분 의아심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본시 이토의 얼굴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만약 잘못 쐈다면 큰 낭패가 되리라. 그래서 뒤쪽을 향하여 일본인 수행원 가운데 의젓하게 앞서가는 자를 새 목표로 삼아 세 발을 이어 쏘았다. 그런 다음 또 다시 생각해 보니 혹시 무죄한 사람을 잘못 쐈다면 반드시 불미한 일이리라. 짐짓 생각하는 사이에 다가온 러시아 헌병에게 붙잡혔다.”(“안응칠의 역사”)

     

     

    이처럼 안중근은 단군조선의 고토(故土)였던 하얼빈에서 대한(對韓) 침략의 괴수 이토를 주살하였다. 그런데 순종은 이토가 죽은 지 하루만인 27일에 통감부에 마련된 빈소를 찾아가 조문하고 또 그 이튿날에는 이토에게 문충공(文忠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조문 사절단까지 보냈다. 이 얼마나 망령된 일인가! 

     

    여기서 한 가지 바로 잡을 것이 있다. 이른바 이토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다. 이토가 절명하기 직전에 의사의 검진을 받다가 통역이 ‘범인은 한인(韓人)’이라고 한 말을 듣고 이토가 “어리석은 녀석이다”이라고 했다는 이 말의 진위 여부이다. 이 말은 일본인 무로다의 목격담에서 나왔다고 한다. 

     

    백암 박은식도 비슷한 말을 남겼다. 백암은 1912년에 쓴 “안중근전”에 이토가 총을 맞을 때 안중근을 가리키며 ‘바카馬鹿(바보)라고 욕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그런데 1915년 “한국통사”에서는 이 말을 인용하지 않았다. 다만 이토가 세 발이 복부에 명중되자, “앗!”하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고 쓰러졌고, 즉시 혼절했는데 기차 안으로 옮겨 주사를 놓자 한때 의식을 회복했지만 10분도 안 돼 숨이 끊어졌다고 했다. 이는 처음에 말한 ‘바카馬鹿’를 수정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상일은 ‘어리석은 녀석’이라는 말은 “죽음을 극화하고 병탄을 왜곡하기 위하여 뒷날 만들어진 기록”이라고 지적했고, 김봉진도 이는 ‘조작한 허구일 확률이 높다’고 보았는데, 이것이 안중근의사의 진면목일 것이다.  

     

    안중근은 이토를 대한 만세의 원수요, 세계 인도의 적이라고 공판정에서 분명하게 밝혔다.

     

    “나는 대한 의병의 참모장이다. 의병을 모집하고 병기를 구입하여 이토를 죽이고 독립을 회복하려 했다”고 말하고, 1910년 3월 10일 오전 10시 형장에서 한복을 갈아입은 후에 “나는 대한독립을 위해 죽는 것이며, 동양평화를 위해 죽는 것인데, 어찌 유감스럽겠느냐?”라고 하며 태연하게 웃었다. 

     

    이토가 죽자 육군대신 데라우찌(寺內正毅)가 후임 통감이 되었다. 이 무렵 강제 합병된다는 말에 인심은 흉흉했다. 이재명 등이 이완용 같은 매국노 처단에 나섰다. 이재명은 이완용의 허리와 등을 찔렀으나 죽이지 못했고, 본인은 사형을 당하였다. 제2의 안중근이 연이어 등장했다. 순절, 순국하는 애국자가 이어졌다.

     

    김봉진 기타규수대학 명예교수가  “안중근과 일본, 일본인”에서 지적대로 일본의 식자들은 한국민이 이토의 통치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면 한국 병탄은 없었을 것이며, 안중근이 이토를 주살하지 않았다면 이토의 훌륭한 통치구상이 아시아에서 실현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해서 말한다. 이것은 이토가 ‘제대로 평가=변호받지 못함’은-실증적이지 못한, 안중근에 얽매인-한국인 탓이라는 궤변일 뿐이다. 이토를 폄하해야 안중근이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다. 

     

    안중근은 이토가 아니어도 이토를 넘어서는 위대한 평화주의자였다. 안중근의 평화는 한국의 독립과 일본의 신의(信義) 지킴을 기본으로 한 것이다. 이토는 제국주의 침략의 개척자이며, 뒤틀린 황국사관의 전도사이며, 동양평화의 배반자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이토의 잔재를 주살해야 한다. 그는 역사전쟁의 원흉이다. 안중근의사는 오늘의 우리에게 간절히 외친다.  “이토에 지면 우리나라가 다시 망한다. 너희 안의 이토를 죽이라. 내가 그랬듯이.” 

     

    오늘 우리에게 안중근의 삶이 주는 교훈은 "아직도 동북아시아는 국가간에 역사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치열하게 진행중"이라는 사실이다. 역사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하기 위해서는 먼저 일제가 왜곡한 거짓된 식민지 역사를 청산하고, 그 위에 바른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다. 

     

    *아래는 위 기사를 '구글 번역'으로 번역한 영문 기사의 [전문]입니다. '구글번역'은 이해도 높이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문 번역에 오류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The following is [the full text] of the English article translated by 'Google Translate'. 'Google Translate' is working hard to improve understanding. It is assumed that there may be errors in the English translation.>

     

     “Kill the Ito Hirobumi inside of us!” According to Ahn Jung-geun, the war of history is not over---Criticism of colonialism ⑧

     

    Baeksan Lee/History Columnist

      

    In 1907, Ahn Jung-geun(安重根 1879~1910) participated in the national debt repayment movement that took place across the country. In July of that year, when King Gojong of the Korean Empire was deposed, he fled abroad. Let's find out the background and circumstances of his exile through his “History of Ahn Eung-chil.”

      

    “In 1907 (Jeongmi), Hirobumi Ito returned to Korea and settled the ‘Seven Treaty’, dethroned Emperor Gwangmu and disbanded the army. In response, 20 million people were mobilized at once. Volunteers revolted everywhere, and the mountains of Samchulli were covered with gunfire. At this time, I hurriedly set up and left my family, and when I arrived in Bukgando, the Japanese military had just been stationed there, and there was no place to set foot. So, after visiting various places for three or four months, he left and entered Russian territory. When we passed Yeonchu and reached Vladivostok, there were 4,000 Koreans living there” (“The History of Ahn Eung-chil”).

      

    What is important here is the so-called "7th Treaty of Jeongmi", the dethronment of Emperor Gojong and the dissolution of the military. The instigator of this work is Ito Hirobumi (伊藤博文).

      

    On February 8, 1904, the Russo-Japanese War broke out with the Japanese Navy's surprise attack on Ryeo-sun. When the war broke out, in March of that year, Ito was appointed as a special ambassador for consolation to the king in order to crack down on Korea. Due to Ito's influence, Korea declared a severance of diplomatic ties with Russia in May. At this time, Ahn Jung-geun said about the Russo-Japanese war, “If Russia wins, there is a risk that it will be annexed to Russia, and if Japan wins, there is a risk that it will be annexed by Japan.”

      

    In 1905, Ito deprived Korea of ​​diplomatic rights and placed it under Japanese jurisdiction. When Hirobumi returned to Tokyo in August 1907, he was greeted like a triumphal general.//

      

    In June 1907, the Japanese forcibly abdicated King Gojong and installed Sunjong on the throne. Proposal of a new treaty stipulating the enactment of laws, the power to appoint officials, administrative power, and the appointment of Japanese officials (deputy ministers), etc., on July 24, 1907 was forcibly concluded. The Japanese imperial government (later to become the Governor-General), which held all powers in one hand, seized most of the Korean sovereignty, and further disbanded the military to eliminate the armed resistance of Korea against the Japanese imperialism.//

      

    1895 (Eulmi) is an important year for the first Euibyeong soldier. The Eulmi Incident (乙未 事變) and Danbalyeong (斷髮令), which assassinated Empress Myeongseong , were a protest against the forced enforcement (Eulmi Reform). Eulsa's Euibyeong soldier (乙巳, 義兵) was caused by the signing of the agreement, and the third period was Jeongmi's Euibyeong soldier (丁未義兵), which was stimulated by the 1907 Korea-Japan New Treaty.

      

    Jeongmi Euibyeong originated from the forced dissolution of the Korean army on August 1, 1907 and the war against Japan by the disbanded soldiers who protested against it. When the disbanded soldiers heard the news that Park Seung-hwan (朴昇煥), the commander of the demonstrators battalion in Seoul, committed suicide on the same day that the disbandment ordinance was issued, they started a resistance war against Japan while conducting a street battle with the Japanese army. After that, disbanded soldiers from each province also rose one after another.

      

    First, on August 2nd, the soldiers of the Wonju Jinwidae (原州鎭衛隊) occupied the arsenal at once, and then joined the militia there and took control of Wonju. The soldiers of Judae, Yeoju, who heard the news, also joined the main unit the next day.//

     

    Next, the soldiers of the Ganghwa Detachment (江華分遣隊) fought against Japan on August 10, and once seized Ganghwaseong, but were dispersed to various places after being attacked by the Japanese army. In addition, the Hongju detachment and the Jinwi Jinwi unit also promoted the uprising plan.//

     

    Min Geung-ho, Park Jun-seong, and Son Jae-gyu, the disbanded soldiers of the Wonju Jin Guard, formed their own Euibyeong-jin(義兵陣) and were active in Gangwon-do, Chungcheongbuk-do, and Gyeonggi-do. Lee Gang-nyeon (李康秊) and Shin Dol-seok (申乭石) and others engaged in anti-Japanese guerrilla warfare in the northern area of ​​Gyeongsangbuk-do, respectively.//

     

    Next, in Gyeonggi-do, Hui (許蔿) enlisted the soldiers of the Ganghwa detachment led by Yeongi-woo (延基羽), and formed a strong basis for resistance in Pocheon and Yeoncheon in the Imjin River basin. And in the Honam area, Anui and Geochang areas of Gyeongsangnam-do, and Gongju, Hoedeok, Yeonsan, and Jinjam, centered on the border area between Jeollabuk-do and Chungcheongnam-do, Kim Dong-shin organized and played an active role in the Euibyeong-jin.

      

    Meanwhile, in the North Korean region, voluntary military anti-Japanese warfare was actively conducted during this period. In Hwanghae-do, Park Jeong-bin and Lee Jin-ryong led an uprising in Pyeongsan, and Kim Su-min, a commoner, Euibyeong-jin, formed a powerful force from Jangdan in Gyeonggi-do to Seoheung in Hwanghae-do.//

     

     

     

    In the case of Pyeongan-do, Ui Byeong-jin of Kim Yeo-seok (金汝錫) was active in the Deokcheon and Maengsan areas, and Chae Eung-eon carried out the anti-Japanese war in the border area of ​​Hamgyeong-do and Pyeongan-do. In the Battle of Hamgyeong-do Euibyeong Anti-Japanese, Hong Beom-do (洪範圖) and Cha Do-seon gathered together the Sanpo-su and mine workers from Samsu and Gapsan to form a strong military army.//

      

    Choi Jae-hyeong (崔在亨) formed the Euibyeong-jin with Lee Beom-yoon, Um In-seop, and Ahn Jung-geun in his hometown of Gyeongwon, North Hamgyeong Province. At this time, a large-scale domestic vacuum operation by the Primoryean volunteers centered on the Dongdonghoe and the Changuidae was launched in July 1908. In other words, 200-300 medics from the Primordial Province, led by Jeon Jeon-ik and below, Ahn Jung-geun and Um In-seop, etc., were waiting at the Tuman River alternative, then crossed the river on July 7 and advanced into Hongui-dong, Gyeongheung-gun. That was the beginning. Choi Jae-hyung and Lee Beom-yun did not directly participate in the domestic vacuum operation.//

     

    Ahn Jung-geun participated in the domestic vacuum operation as a commander of Dong-eui-gun and had a unit. It is a system in which the members of the donguihoe are the highest commander, Dojang, and under him, the seated commander and the right commander. The top commanders of the Dong-Eui Army were Jeon-ik Jeon in Dojang-eok, In-seop Uhm in-seop and Jung-geun Ahn in Woo-jang. As can be seen in this organization, Ahn Jung-geun was a key cadre of the Primorsky medics and a field commander who played an important role in the process of developing the anti-Japanese war. As part of a domestic vacuum operation, Ahn Jung-geun led his medics from Posiette on July 7, 1908, and crossed the Tumen River. After crossing the river, Ahn Jung-geun's corps of volunteers started the anti-Japanese war at Hongui-dong, Gyeongheung-gun, on the Tuman River.//

      

    “It was around the 5th of the 6th lunar calendar in 1908 that I was engaged in combat as a Euibyeongl soldier… With Lee Beom-yoon’s former police officer Jeon Ik as the general, Um In-seop became the left commander, and I became the right commander. He crossed the Tuman River with 50 volunteers and sent to Gyeongheungbu.”//

      

    According to Kim Bong-jin's research, Ahn Jung-geun's position at that time is considered to be "Lieutenant-General of the Staff and Commander-in-Chief of the Allied Forces". Ahn Jung-geun was dispatched to Gyeongheungbu in the 6th month of the lunar calendar in 1908 to fight the Japanese army. At this time, Ahn Jung-geun said as he released the captured enemies despite the opposition around them. It is quoted from “Ahn Jung-geun and Japan, Japanese” written by Kim Bong-jin (emeritus professor at Kitakyusu University, Japan) (Newly published by Knowledge Industry Co., Ltd.).//

     

     He said, “Only after accusing Ito’s vicious strategy and making it known to the world, will he be able to relieve his resentment and regain national sovereignty. It is the so-called weakness to defeat the strong, and to oppose the evil law with good manners.” (Kim Bong-jin, “Ahn Jung-geun and Japan, Japanese”)//

      

    Finally, when Ahn Jung-geun arrived in Vladivostok on October 19th, rumors abounded that Ito would come. Ahn Jung-geun checked it over and over again, and it was unmistakable information. “To be able to achieve the purpose I had been wishing for for many years without anyone else’s knowledge! I will put an end to the old thief with my own hands!” he rejoiced. The fateful day was October 26, 1909, around 9:30 am.

     

     Ahn Jung-geun, who saw that Ito's vicious strategy was in the extortion of Joseon, entered Vladivostok, Russia, on February 7, 1909.

    He soon organized a secret society called Danjihoe (斷指会, Danji Alliance) under the guidance of Jaehyeong Choi, who served as the first finance minister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At this time, Ahn Jung-geun and other members made a plan to assassinate Hirobumi Ito and Lee Wan-yong, who were blamed for the invasion of Joseon, and said that they would atone for the people by suicide if they did not succeed within three years. So, he cut off the fourth finger of his left hand and strengthened his will to fight against Japan with blood.

      

    At this time, Ahn Jung-geun, who cut off the ring finger of his left hand, used the blood to write the four letters on the front of his Taegeukgi, indicating the independence of Korea. After he finished writing, he sang ‘Long live the Korean independence’ three times at once, and then he made an oath to heaven and earth. His place is Yeonchu (煙秋, Yanchihe, present-day Kraschino) of Nam Uslik. Choi Jae-hyeong's house was here in Yeonchu.

     

    “I thought, ‘That guy must be the old thief Ito’. He immediately drew out his gun and fired four shots at his right, and as he thought about it, his doubts crossed his head. It was because I didn't know Ito's face. If you shot it wrong, it would be a huge disappointment. So he turned to the back and fired three consecutive shots, aiming at the proud leader among the Japanese entourage. Then I thought about it again, and if I ever shot an innocent person the wrong way, it must have been a bad thing. I was caught by the Russian military police who approached me while I was thinking.” (“The History of Ahn Eung-chil”)

      

    As such, Ahn Jung-geun assassinated Ito, the monster of the invasion of Korea, in Harbin, the homeland of Dangun Joseon. However, on the 27th, one day after Ito's death, Sunjong visited the mortuary prepared by the General Superintendent's Office to pay tribute to him, and the next day he gave Ito the title of Munchunggong (文忠公). He also sent condolence delegations. What a ghastly thing this is!

      

    There is one thing to correct here. So-called Ito's last words. Just before Ito passed away, while undergoing a doctor's examination, the interpreter heard that the interpreter said that the culprit was Korean. It is said that this phrase comes from a Japanese eyewitness account of Muroda.

     

    Baekam Park Eun-sik made a similar statement. In “Ahn Jung-geunjeon” written by Baek-am in 1912, when Ito was shot, he pointed to Ahn Jung-geun and sweared at him as “Baka-馬鹿 (idiot).” However, the 1915 “Korean History” did not quote this phrase. However, when Ito was hit with three bullets in his stomach, he collapsed with a scream of “Ah!”, and immediately fainted. This can be seen as a modification of the 'bacca' mentioned at the beginning.

     

    Sang-il Han pointed out that the term ‘stupid guy’ is “a record made later in the day to dramatize death and distort the military battle”, and Kim Bong-jin also saw that it is “probably a fabricated fiction,” which is probably the true essence of Doctor Ahn Jung-geun.

     

    Ahn Jung-geun made it clear at the trial that Hirobu Ito was the eternal enemy of Korea and the enemy of mankind around the world.

     

    “I am the Chief of Staff of the Korean Euibyeong soldier. He said, “I was going to kill Ito and restore independence by recruiting Euibyeong and purchasing weapons,” and after changing into hanbok at 10 a.m. on March 10, 1910, he said, “I am dying for Korean independence, and I am dying for peace in the East. But, how can you be sorry?” He laughed calmly.

      

    Upon Ito's death, the Minister of the Army Terauchi became his successor. At this time, the people's hearts were atrocious when they heard that they were forcibly annexed. Lee Jae-myung and others began to punish tyrants like Lee Wan-yong. Jae-myung Lee stabbed Lee Wan-yong in the waist and back, but was unable to kill him, and he was sentenced to death. The second Ahn Jung-geun appeared one after another. Purity and patriotism followed.

     

    As Kim Bong-jin, an emeritus professor at Kitakyusu University pointed out in “Ahn Jung-geun and Japan and the Japanese,” the Japanese literate would not have enlisted Korea if the Korean people had actively supported Ito’s policy of government. I'm assuming this would have been realized in Asia. This is just a sophistry that Ito's 'proper evaluation = not defended' - not empirical and tied to Ahn Jung-geun - is the fault of Koreans. Ahn Jung-geun does not become great by disparaging Ito.

     

    Ahn Jung-geun was a great pacifist even if he was not Ito. Ahn Jung-geun's peace was based on Korea's independence and Japan's protection of trust. Ito was a pioneer of imperialistic aggression, an evangelist of the distorted view of the Empire, and a traitor to oriental peace.

     

    Therefore, we must kill the remnants of Ito that remain within us. He is the culprit of the historical war. Dr. Ahn Jung-geun earnestly calls us today. “If we lose to Ito, our country will collapse again. Kill the Ito within you. Like I did.” 

     

    The lesson that Ahn Jung-geun's life gives us today is the fact that "the historical war between countries in Northeast Asia is still not over and fiercely ongoing." In order for us to win the war of history, it is necessary to first clear the false colonial history distorted by the Japanese imperialists and record the right history on it. 19edd1d818872de4f446f564957c6763_1662173447_9903.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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