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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민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천도교청우당과 청년통일운동 (임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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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dongmin
    댓글 댓글 2건   조회Hit 3,542회   작성일Date 22-09-13 09:42

    본문

    동민회의 역사를 돌이켜보며:
    천도교청우당과 청년통일운동

    1926년 천도교단의 분열에 따라 천도교청년당에서 구파 계열 청년들이 탈퇴하여 천도교청년동맹을 조직하고 비타협적 민족노선을 견지하며 6‧10만세, 신간회 결성에 적극 가담하며 항일투쟁에 앞장섰다.

    한편 신파 계열 청년들은 기존 천도교청년당을 운영하며 신문화운동을 지속하기 위하여 표면상 타협노선을 가진 것처럼 비춰지지만 불불당-오심당의 지하조직을 만드는 등 신파계열청년 역시 비타협노선을 견지하고 있었다.

    포덕72(1931)년 2월 16일 청년당과 청년총동맹의 합동대회가 개최되어 양단체를 해체하기로 하고 “천도교청우당(天道敎靑友黨)”을 새롭게 출범시키며 대일 항쟁을 위한 천도교전위단체의 단일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천도교청년들은 일제가 조선의 제 단체들을 강제 해산시키며 지하조직으로 잠적할 수 밖에 없었다.

    천도교는 해방을 맞아 해산되었던 전위단체(前衛團體-천도교 교리를 사회적 실천해가는 조직)인 천도교청우당을 1945년 10월 31일 부활시키면서, 분단의 고착화로 치달아가는 정국(政局)을 반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호응하여 북한 지역에서도 1946년 2월 ‘북조선청우당’을 부활시켜 남북 천도교의 연대 속에서 통일 조국 건설을 위한 행보를 이어나갔다.

    천도교는 초기에 미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면서 일체의 조선인의 결사를 부인하는 데 대하여 비판적으로 접근하면서, 여운형 등이 중심이 된 ‘인민공화국’을 지지하는 한편, 1945년 11월에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통일국가를 수립하자’는 입장을 공포하였다.

    1945년 12월 15일에는 천도교, 기독교, 불교, 유교, 천주교의 6개 종단 대표 100명씩, 600명으로 구성된 ‘조선독립(=통일정부수립)촉성종교단체연합’ 모임 결성을 주도하여, 천도교중앙대교당에서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는 김구도 참석하여 격려하고 임시정부 지지에 대해 치하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국내의 좌익과 우익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소련군과 미군이 각각 진주한 북과 남의 분단은 고착화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러나 천도교(청우당)의 입장은 좌-우익을 모두 경계하고, 민족자주 정신에 입각한 제3의 정치체제로서 신 국가 건설에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1946-1947) 천도교(청우당)의 통일운동 이념과 지향은 ‘좌우합작’과 ‘자주적인 통일정부수립’의 두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남과 북에서 각각 ‘단정수립’ 움직임이 강화되어 나가면서 통일정부수립의 희망이 점점 좌초하는 쪽으로 흐르자, 천도교청우당에서는 1948년 3월 1일을 기하여, 기미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대대적인 민중궐기를 통해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통일정부수립’을 지지하며, 촉구하는 시위운동을 전개키로 하였다.

    최종적으로 이 "3.1재현운동"이라 명명된 거사 계획은 사전에 탄로되고 말았다. 다만 일부지역에서는 계획했던 대로 ‘통일공약 5장’을 포함한 ‘통일선언문’을 살포하고 시위행진을 실행하였다. 사전 검거된 인원을 포함하여 이들은 대대적으로 북조선 당국에 검거되어 187명이 처형되고 7천여 명이 투옥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 와중에 김구와 김규식을 중심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요인회담’이 진행되자  1948년 4월 14일부터 평양에서 개최된 ‘전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에는 청우당(남한)에서 6명 북조선청우당에서 9명 등 15명이 신청하여, 최종 4명이 참석하였으며, 그 밖에 최동오(임정 법무부장), 신숙(한국독립군 참모장) 등의 천도교인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남과 북에는 각각 단독정부가 수립되었고, 남한의 천도교청우당은 (북조선청우당과의 관계 등과 관련하여) ‘좌익 활동 혐의’로 1949년 12월 26일 해산되고 말았다.
    해방정국에서 천도교의 통일운동은 청우당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지만, 교단 내에 구파(舊派) 계열에서는 보국당(輔國黨)을 별도로 결성하여 통일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역시 강제로 해산된 뒤에는 만화회(萬化會, 위원장 申肅)를 결성하여 통일운동을 계속해 나갔다.

    6.25 전쟁은 천도교단의 정치 지향의 지형을 급속하게 변화시켰다. 1948년의 ‘3.1재현운동’의 좌절과 6.25를 겪으며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의 우익(반공) 성향의 천도교인들이 대거 월남하면서, 6.25 이후 남한에서의 천도교의 정치 지향은 급속도로 우경화되어 갔다. 전쟁과 휴전 직후라는 정세 속에서 교단 내의 민족주의(및 좌파) 세력은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1952년 천도교청년들은 천도교청년회 부활대회를 개최하며 전위단체 구성을 위한 노력을 하였으나 수차례 부침을 겪다 포덕106(1965)년 재결성되어 전위적 역할을 하는 부문단체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한편 천도교 내 민족주의 세력은 1957년 ‘전위단체(前衛團體)’의 재건을 위한 ‘동학회(東學會)’가 결성되었다. 동학회의 강령은 청우당의 강령을 거의 그대로 수렴, 계승하면서 통일운동에 매진하였다.

    1960년 4.19혁명을 맞이하여 폭발적으로 확장된 통일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동학회가 발표한 정책들은 “4.19혁명을 적극 지지하면서 그 운동을 민족통일운동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자”는 것으로 집약되었다. 그 연장선상에서 동학회는 정당(청우당) 재건에 착수하여 준비위원회 차원의 정강정책에는 ‘외교’ ‘내무행정’ ‘국방’ ‘상공’ ‘농업’ ‘문교’ ‘보건사회’ ‘재정’ 정책이 모두 포함되었으며 최우선 과제인 외교정책의 제1항을 “통일 촉진”으로 삼은 데서 알 수 있듯이 여전히 ‘민족통일’을 제1 과제로 삼고 있었으나 동학당 결성 준비는 1961년 5.16쿠데타로 좌절되고 말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천도교의 통일운동은 지하화, 사막화, 암흑화하고 말았다.

    당시 천도교단 내의 정세 인식은 북의 사회주의 체제, 남의 자본주의 체제를 중심으로 남북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민족자주, 민중자립, 생명평화를 지향하는 천도교의 사상과 신앙이 위축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천도교의 전국대회(全國大會-최고의결기구)가 개최될 때마다 거의 ‘전위단체 재건’의 방안이 중요 안건이었고, ‘재건 결의’가 이루어졌다. 또한 천도교단이 매년 정기적으로 시행하는 ‘특별기도’에서는 언제나 ‘통일염원’의 기도 주제가 빠짐없이 명시되었다.

    60, 70년대의 암흑기를 거치는 동안 쌓아온 통일에의 열망은 1984년 <민족통일연구회> 결성으로 새로운 단계로 도약을 준비하였다. 1988년 교령으로 취임한 정운채 당시 교령은 그해 5월 1일부터 ‘통일이 될 때까지’를 기한으로 ‘평화통일기도’를 시행하고  <통일기도문>을 채택하여 일상생활과 모든 의식에서 이를 항상 기도하게 하였으며, “자주주의 통일”이라는 기본 통일 방침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1989년 4월 제26차 전국대회에서 다시 한 번 천도교전위단체 재건을 위한 결의안이 채택되었고, 1991년 5월 11일, 전북 정읍의 황토현(동학혁명 당시 승전지)에서 ‘전위단체’로서의 동학민족통일회(이하 동민회) 창립대회가 개최되었다.

    이후 동민회는 1999년 5월 29일 “민족통일 자주 동귀일체 통일방안”을 제정하였다. 이 방안은 이후 수정 보완을 거쳐 2002년에는 <민족자주통일방안>으로 성안되었고, 현재도 수정 보완을 하고 있다.

    북조선의 천도교는 광복 직후 강고한 세력으로 재건(300만)되었다. 해방정국의 좌우익 대립과 6.25를 겪으며 많은 ‘(반공)천도교인’들이 월남하였지만, 여전히 북조선의 천도교는 청우당이 노동당 다음가는 정당 세력으로서, 또한 항일민족운동에서 북한정권의 주축(김일성) 세력과 연대했던 내력을 토대로 굳건한 세력을 유지하였다.

    1959년 전후 ‘반종파투쟁’ 당시에 국내파 천도교인 세력(김달현 등)이 몰락하였으나(이때 이 사건에 연루되어 김원봉도 숙청되었다), 북조선 정권의 핵심(김일성)과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함께했던 박인진, 강제하 선생 계열을 중심으로 여전히 그 실질적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6년 미국으로 망명하였던 최덕신 교령(김일성 화성의숙 스승인 최동오의 아들)이 1986년 북조선에 정착하면서, 북조선 천도교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였다. 한동안 위축되었던 ‘천도교 활동’이 활발하게 재개되었으며, 남북 천도교 교류에도 새로운 활력소가 되었다. 최덕신 사후(1989)에는 그의 부인 류미영이 북조선 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및 청우당과 단군민족통일협의회의 수장직을 계승하여 역임(2016 환원)하였으며, 최근(2019년)에 남쪽에 남겨졌던 그의 아들(최인국)이 월북하였다.

    천도교는 동학민족통일회 창립에 앞서 1989년 7월 3일에는 <천도교 남북교류 추진위원회>를 결성하여 전위단체 운동과 별개로 교단 차원의 남북교류 사업을 전담케 하였다. 그해 10월 기자회견을 열고 북한 천도교인 초청을 공식화했다. 이후 남과 북 사이에는 제안서 형태로 상호 제안과 교류 협력 방안 협의가 이루어졌다.

    직접적인 남북 천도교 접촉은 1991년 10월 27일-11월 2일 사이 네팔 카트만두에서 열린 ACRP 총회석상에서였다. 당시 임운길 천도교중앙총부 교화관장이 이 회의에 참석하여 북한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정신혁 부위원장과 남북 분단 후 처음으로 직접 상면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그간 오간 제안서들의 진정성을 재확인하였다. 이후 미국을 경유한 서신이 여러 차례 오가며, 남북 천도교 대화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1993년 10월 드디어 천도교 남북 대표 간 회동이 이루어졌다. 1993년 1월 19일-20일 이틀간 중국 북경에서 오익제 당시 천도교중앙총부 교령과 류미영 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위원장이 2차례 회동하여 ‘동학혁명100주년기념행사 공동개최’ 등을 합의하고 남북 천도교의 <공동합의문>을 채택했다. 합의문(요지)은 다음과 같다.

    (1) 조국통일이 민족 최대, 천도교 최고의 숙원이다. 천도교인들은 7.4남북공동성명의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지지한다.
    (2) 통일을 위하여 ”민족대단결“을 최우선 과제로 한다.
    (3) 1990년대를 통일의 연대로 장식하기 위하여 공동 노력한다.
    (4) 동학혁명백주년행사를 공동 개최키로 하고 실무접촉을 진행한다.
    (5) 천도교중앙총부와 북조선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는 남측의 교령과 북측의 위원장을 상호 초청하며, 이에 응하기로 한다.

    이 합의문의 구체적인 내용(동학혁명백주년 공동개최, 상호 방문 등)들은 당국의 불허로 성사되지 못하였으나,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공동합의문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 그 이후 90년대 내내, 그리고 2000년 6.15남북공동 선언 이후 천도교는 그 어느 종단 못지않게 활발한 남북 교류 및 통일운동 전개에 앞장서 왔다. 1990년대 내내 중국, 일본 등지에서의 남북 천도교 접촉은 계속되었고, 일본의 천도교(신호교구) 및 적십자사를 통한 북조천 천도교인 및 동포 지원을 위한 인도적 사업에도 활발히 참여하였다.

    그러던 중 1997년 천도교 교령을 역임하고, 남북 천도교 지도자 최초 회동을 이끌었던 당사자인 오익제 전 교령이, 대통령선거라는 민감한 시기에 월북함으로써, 남북 천도교 교류 및 천도교통일운동은 다시 한동안 경색 국면을 면치 못하였다. 1999년에는 박남수 당시 천도교 종의원 의장이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대표단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한 자리에서 류미영 위원장을 예방하였고, 한영업 부위원장과 남북 천도교 현안 사항과 협력에 관한 의견을 교환하고, 해방 후 남측 천도교 고위인사로는 최초로 북조선천도교중앙교당을 방문하였다.

    이러한 남북 천도교 교류 협력 분위기 속에서 한편으로 천도교 통일운동의 한 축은 <민족자주통일방안>에 대한 남북한 간의 이견을 좁혀 나가고, 변화하는 시대 정세에 따라 그 내용을 수정 보완하는 노력으로 이어져 왔다.  2000년대의 남북 천도교 교류 및 천도교 통일운동은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여타 종교단체의 교류 협력 사업의 범주를 공유하는 바탕위에서 전개되었다.

    그해 8월 15일-18일간의 이산가족 서울 방문단 단장으로 류미영 북조선천도교중앙지도위원회 위원장이 단장으로 35년(미국망명, 1976) 만에 남한을 방문하였다. 류미영 위원장은 공식 행사 외에 김광욱 당시 천도교 교령과 회동하여, 향후 통일운동을 남북의 천도교가 앞장서고 주도해 나가야 한다는 데 뜻을 함께하였다.

    2000년대 이후 통일운동의 정세 변화에 따라서 통일운동의 범주에는 ‘일본 제국주의 부활’ 음모 분쇄,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 운동 등, 국제적/세계적 환경을 민족통일에 유리하게 이끌어 내는 데에도 관심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또한 KCRP를 비롯한 종교연합단체 주최의 남북교류 행사는 물론이고, 남과 북의 천도교 독자적인 교류 협력을 위한 개성, 중국(심양)에서의 사전접촉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2010년 이후 남북천도교는 대일 문제나 3.1운동 정신으로 민족통일을 달성해야 한다는 원론적인 차원에 대해서는 거의 매년 공동의 의지와 협력 필요성을 재확인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일을 앞두고, 천도교중앙총부는 2018년 (금강산 남북종교인 교류모임) 북측 천도교에 3.1운동 100주년 행사를 공동 개최할 것을 제안하고 합의를 이루었다. 당시 천도교는 7대종단과 함께 “3.1운동 100주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2016년부터 공동사업을 진행하고 있었으므로, 이 합의가 이행되었다면, 3.1운동 100주년은 남북 공동행사는 남과 북의 천도교뿐 아니라, 종교계 전체가 함께하는 사업으로 추진될 수 있었으나, 국내 사정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해방이후 천도교청년회의 주력 사업 중 통일운동은 최우선 과제였다. 특히, 2002년 진행된 남북해외청년학생통일대회를 비롯하여 청년학생단위의 통일문제에 있어서 최전선에서 활동해왔다. 현재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청년미래위원회, 615남북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청년학생본부의 주요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으며, 국내의 통일운동의 흐름속에서 남·북·해외의 청년학생단체들과의 교류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교류 활동으로 2019년 2월 금강산에서 열린 남북해외 새해맞이 행사의 참여, 그해 10월 일본에서 열린 10.4선언 기념행사 등의 참여가 있었고, 3.1절과 광복절에 열리는 청년학생대회 등 다방면의 통일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가 다시금 얼어붙던 시기인 2019년 9월 2일 천도교청년회 창립100주년 기념식에 북측의 축하연대사가 도착하여 주변의 부러움을 사기도 하였다.

    * 천도교청우당은 통일을 상징하는 단어이다. 아래 글은 종교인통일협약특별위원회에서 박길수 천도교위원이 발표한 글을 요약하고 청년회 이야기를 덧붙였다. (임순화동덕 정리)(2022.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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